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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누나 Oct 14. 2020

04.

오므라이스와 소시지 야채볶음

  삐입.

 수영장 출입 카드를 찍고 탈의실로 들어섰다. 옷가지를 하나씩 벗는데 오늘따라 더 말라 보이는 건 기분 탓이려나. 근육이 다 빠진 듯 볼품없이 가녀린 자신의 몸을 예슬은 한참동안 거울을 통해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 빠지고 잘 나오시니 좋네요.”     

 담당 수영강사는 이제 대학을 갓 졸업했을까, 탄탄한 몸이 젊음을 그대로 뿜어내고 있다. 그에 반해 어린 테가 아직 있는 얼굴. 

 성인이 되고나서 받는 수영 강습이 조금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는데, 매일 얼굴 보는 이들이 생기니 나쁘지도 않다.     


 “아이고, 우리 반 꽃 예슬 씨 왔어? 어쩜 화장을 안 해도 예쁘대?”

 “어머, 아니에요, 이거 주근깨 보세요. 그리고 여기여기, 몸에 상처도 얼마나 많은데요.”     

 오전 반이라 대다수가 동네 아주머니들인 예슬네 수영반. 운동 겸 수다 겸 마실 나오는 듯한 분위기다. 수영이 끝나면 바로 앞 카페에서 또 그 수다는 무한히 이어지곤 한다.     

 “예슬 씨, 우리 아들이 이번에 대학원 졸업하고 곧 교수될 준비할 거야. 어디 한 번 만나보지 않을래?”

 “어머, 저 며느리 감으로 생각하시는 거예요? 영광스러워라.”     

 어떤 말도 적당히 너스레 떨며 받아칠 줄 아는 것도 직업병이다. 비행기를 탔었다는 과거를 어쩌다 밝히게 된 날 이후로 아주머니들의 호기심은 두 배로 커졌다.     

 “나도 처녀 때 승무원이 꿈이었는데, 키가 땅딸막해서 지원도 못했지만, 호호”

 "여자들이라면 한 번씩 다 해보고 싶은 거 아니야? 난 다리가 너무 못생겨서 치마는 못 입겠지만 말이야."

 “예슬 씨, 비행 얘기 좀 해줘, 우리는 듣는 걸로도 재미난다.”

 “아유, 한국만 그렇지 외국에서는 바지 유니폼도 입어요 요새는. 아, 글쎄요... 참, 저 한 번 사무장한테 된통 깨진 얘기 해드릴까요? 승무원들은 비행기를 대략적으로 알지 기술적으로는 모르거든요, 근데 그 날따라 승객분이 시스템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길래 아는 데까지 대답했다가 잘못된 정보를 드렸나봐요. 나중에 사무장한테 공부 제대로 하라는 둥,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는 둥 난리도 아니었어요.” 

 "어머어머, 난 승무원 언니들은 다 잘 알거라고 생각했지 뭐야, 호호호."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탑승 때 잘생긴 사람 없나 슬쩍 둘러보는 게 비행마다의 재미랄까요. 히히"


  건강상 문제가 생길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그녀다. 누구보다 건강하고, 건강할 것이라고 자만했다. 4년 차쯤 되었을 때 가끔 허리가 찌릿찌릿 하긴 했어도 오래 서 있던 탓이겠거니, 다들 있는 직업병이겠거니 넘겨왔다.      

 어느 날 새벽, 컴컴한 밤인데도 한 쌍의 라이트가 점멸하듯 어지러움과 함께 찌르는 듯한 고통으로 잠에서 깼다. 일어나려고 하자 더 끔찍한 통증이 그녀를 짓눌러, 겨우 전화기를 들어 구급차를 스스로 불렀다. 진통제를 맞고 그 날은 넘겼지만, 병원으로 가는 동안 이대로 못 일어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던 그 밤을 잊지 못한다.     

 “일을 그만두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치료받으면 나아지겠지만 다시 무리하게 육체적인 일을 하면 말짱 도루묵이에요.”     

 그렇게 3개월을 쉰 거였다. 회복은 생각보다 빨랐으나 예전처럼 강도 높은 운동은 무리였다. 무서워졌다. ‘또 다치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인장처럼 박혀 나이와 비례하듯 겁이 늘어났다. 물 속보다는 뛰는 걸 좋아하던 그녀가 의사가 추천한 수영을 다니게 된 연유다.     




  노란 오므라이스와 빨간 소시지 야채볶음은 예슬이 마라톤 선수를 하던 중학생 때 어머니가 자주 싸주시던 도시락 메뉴다. 대회가 있는 달에는 방과 후 훈련을 매일 했기 때문에, 저녁때까지 학교에 있던 날이 많았다. 반찬 칸에 제일 자주 들어간 조연들은 진미채와 새콤달콤 볶은 김치.

 어머니가 여유가 있는 아침에는 부드러운 달걀 이불을 예쁘게 덮은 오므라이스를 만들어주셨다. 오므라이스가 딱 알맞게 들어가는 납작한 스테인리스 도시락 통이 식탁에 올려져 있는 날에는, 도시락 통만 봐도 예슬은 기분이 좋아졌다. 거기에 소시지 야채볶음을 항상 곁들여 주던 것은 예슬이네집 공식 아닌 공식.     

 “우와, 오늘 오므라이스야? 저녁때까지 못 기다릴 것 같은데, 히히.”     

 실제로 저녁 시간 훨씬 전, 훈련을 시작하기도 전에 먹어치운 적이 여러 번이다. 예슬은 가방 속에 오므라이스가 있다는 게 수업 내내 머리 한 구석에 맴도는 게, 수업에 집중이 안 돼서라도 먹었다는 핑계다. 그 오므라이스들을 먹고 키가 이렇게 컸나 싶다.     


  추억이 많은 도시락 메뉴를 그대로 지훈에게 만들어 주고 있던 아침이다. 아들 만나보라고 매일같이 말씀하시던 수영반 아주머니가 좋은 저염 명란젓을 구했다며 예슬에게 선물해 주셨다.‘예슬 씨, 잘 좀 먹어, 너무 말랐어! 명란젓 밥에다 비벼서 푹푹 떠 먹어봐, 참기름 넣고, 알았지?’라는 따뜻한 말씀과 함께.

 쪽파를 쫑쫑, 하얀 밥에 명란젓과 함께 볶아낸다. 문어발 모양으로 칼집을 낸 조그만 소시지들은 케첩에 고추장, 올리고당을 살짝 넣은 소스로 양파, 당근과 함께 빠르게 볶아 한 김 식히기. 

 예쁜 지단을 만들기가 어렵다. 엄마는 어떻게 매번 완벽한 타원형 몽글몽글한 달걀옷을 만드셨을까. 예쁘게 말아주기는 틀렸다.      

 “옛날 생각나네, 이거 보니까. 마음 같아서는 매일 해주고 싶었는데. 그런데 난 정말 네가 국가대표라도 한다고 할까봐 솔직히 걱정했다.”      

 지단과 사투를 벌이는 예슬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어머니.      

 “왜? 혹시 알아, 계속했으면 내가 금메달리스트가 되어있었을지.”

 “아유, 그러니까. 너무 유명해질까 봐 걱정했다고.”     

 정말 운동선수로서의 삶을 살았다면, 허리 수술을 받는 일도 없었을까. 아니면 오히려 더 다쳤을까. 언제나 가보지 않은 길이 아쉬운 법이거늘, 엄마의 마음도 알 것 같아서 농담처럼 넘겨보려는 것이다. 그것도 다 읽어내는 어머니는, 딸 본인이 가장 힘들 거라는 것을 너무 잘 안다. 자식 걱정이 부모의 평생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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