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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누나 Oct 16. 2020

06.

차슈 덮밥

다들 감내하는 지옥철 출근길이려니 싶었다.

취직만 되면 그까짓 몸고생, 뭐가 대수일까. 취준생 생활이 일 년이 조금 넘었을 때쯤, 이름 대면 다 아는 대기업은 아니었지만 가능성이 보이는 스타트업 회사 면접을 봤다. 회사 대표와 일대일 면접을 보면서 대기업보다 오히려 지훈 본인의 역량을 펼칠 수 있을 것 같은 좋은 인상을 받기도 했다.     

 “2차 면접 점수가 아주 좋더군요. 비결이 뭐였다고 생각합니까?”     

 “예, 솔직해지려고 했습니다. 아는 대로, 준비한 대로 임했습니다. 조금 더 아는 척해봤자 임원분들에게 금방 들통나지 않겠습니까. 하하.”     

 “스타트업 회사지만 베테랑들을 스카우트해왔으니 그 말이 맞습니다. 다들 척하면 척, 알아보는 법이지요. 그런데 이 문서는 요구하지 않았는데 제출하셨더라고요, 설명해주겠습니까?”     

 “예, 제 능력껏 귀사가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타사 진행건과 비교 분석해보았습니다. 물론 부족한 자료입니다만, 준비하면서 귀사에 대한 공부를 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사원증을 목에 달게 된 올해 여름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 편도 최소 1시간 15분, 주 5일을 통근하는 일은 생각보다 고되다. 입사한 지 3개월이 조금 안 되었던 지난주, 자주 가던 호프집에서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이 녀석은 대한민국에서 손꼽는 대기업에 일찌감치 졸업 하자마자 입사해서 어느새 4년 차, 벌써 집을 산다느니 차를 산다느니 부러운 소리만 해 댄다.     

 “야, 그러면 뭐하냐, 연애할 시간이 없어서 결혼을 못 하는데. 결혼을 하려면 일을 줄여야 하는데, 그러면 돈이 없고. 이 쳇바퀴를 어쩌냐?”     

 “난 소정이랑 3년 째 만나고 있는데 이제 일 시작해서 대체 결혼을 언제 하겠냐. 누가 더 안됐는지 사장님한테 물어볼까.”     

 “크, 청년들의 살아있는 고민이렸다. 아, 그보다 이거 부동산 어플 다운로드해봐, 너 그렇게 출퇴근하다가 결혼하기 전에 나자빠질 수도 있다. 요새 은행에서 대출 어렵지 않아, 방 구해봐라.”     


  그 날은 대수롭지 않게 넘긴 얘기였지만 그 뒤로 틈만 나면 습관처럼 방 시세를 확인하고 있는 지훈이다. 알아보니 정말 대출도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을 것 같고, 그리 큰돈 나가지 않고 회사와 멀지 않은 동네에 방을 얻을 수 있겠다 싶다. 대학생 때 자취를 해 본 경험이 있는 누나 예슬에게 어플에서 본 몇 개 방을 메시지로 전송했다.      

 ‘사진으로 봐선 잘 몰라. 힘들더라도 발품 팔아야지. 주말에 같이 한 번 둘러보자.’     

 혼자서는 잘 모르기도 하지만 귀찮기도 해서 갈까 말까 망설였는데, 누나가 먼저 얘기해주니 일단 든든하다.        



 토요일 정오, 약속 잡아 둔 중개인을 만난 예슬과 지훈. 당장 계약할 마음은 아니라 가볍게 갔지만 직접 방을 보니 이것저것 따져보게 된다. 첫 번째, 두 번째, 그리고 일곱 번째 집을 보고 있자니 비교는커녕 처음 봤던 건 생각도 안 날 지경이다.      

 “화장실에 창문이 없었던 게 두 번째였나? 창문이 컸던 건?”     

 “이 정도면 될 것 같아요, 오늘은. 더 보다간 기억도 안 나고 피곤하기만 할 것 같네요. 상의를 좀 해보고 최대한 빨리 연락드리겠습니다.”     

 아쉬움이 묻어나는 인사를 하는 중개인을 뒤로하고, 예슬이 빠르게 마무리를 지으며 지훈을 잡아끈다. 해도 저물어 가는데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니 제법 쌀쌀해졌다. 근처 카페를 찾은 남매. 따뜻한 카페라테와 사과향이 나는 차 한 주전자를 주문한다. 몇 시간 집 보기에 지쳤는지 허기가 져 베이커리 메뉴를 유심히 살핀다.      

 “뭘 골라 누나는, 딱 좋아하는 거 있구먼. 여기, 아보카도 베이글 샌드위치도 하나 같이 주세요. 아, 브라우니도 하나 추가할게요.”     

 아보카도를 딱히 좋아하는 편이 아닌 지훈을 생각해서 다른 메뉴를 고민하고 있는 누나를 단번에 눈치챈 동생.

 따끈하게 구운 베이글 사이에는 잘 후숙 된 아보카도가 얇고도 가득 들어있다. 구운 마늘향 크림치즈와 약간의 페퍼론치노가 알싸한 매콤함을, 삶은 달걀까지 든든한 샌드위치. 한 입 앙, 만족스럽게 베어 물고 예슬은 얕은 한숨을 뱉는다.     

 “서울 집값이 정말 만만치 않다. 내가 대학 다닐 때랑은 차이가 많이 나고. 마지막에 봤던 집은 일부러 좋은 거 보여준 거 같지? 보증금 걱정이라면 그건 내가 일단 해줄 수 있는데, 그보단 밥이며 빨래며, 청소 혼자 하는 게 또 문제 아니겠니.”     

 홍차를 한 모금 마시는 지훈은 방을 보기 전보다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졌다.          


 안 그래도 방 보느라 주말이 주말 같지 않았건만, 월요일 오전부터 심부름을 몇 군데나 다녀오느라 진이 빠졌다. 새로 들어가는 프로젝트에 앞서 시장조사에 착수한 지훈이네 팀에서 발로 뛰는 건 막내 지훈의 몫이다. 스타트업 회사인 만큼 부장급도 젊은 편이라 회사 분위기는 자유로운 편이고, 회식도 거의 없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실적이 거의 없이 새로운 프로젝트를 몇 개씩 진행하니 때때로 회의감 같은 게 드는 게 사실이다.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체적으로 잘 안 잡히지? 시키는 것만 하는 것도 바쁘니까. 2, 3년 차는 그렇다고 봐야 돼, 조금 더 버티라고.”     

 그런 지훈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얼마 전 어깨를 툭툭 치며 지나가는 말처럼 건넨 팀장. 일말의 위로가 되기는 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아야지 싶으면서 말이다.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실 시간 없던 지훈은 겨우 점심시간 직전에 사무실로 돌아왔다. 입사 선물이라며 아버지가 조금 무리해 장만해주신 갈색 재킷을 고이 벗어 걸어두며 한숨을 돌린다. 허기가 몰려온다.     

 ‘도시락, 도시락.’     

 출근해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도시락을 얼른 꺼내 들었다.     

 “지훈 씨, 오늘은 무슨 반찬? 개구리 반찬?”     

 “아, 대리님, 그렇게 수준 낮은 개그에는 반응도 못 해 드려요.”     

  도시락 뚜껑을 열었더니 판도라 상자가 열리듯 맛있는 고기 향이 훅 올라온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고기덮밥. ‘차슈’라고 불린다는 간장물 먹은 삼겹살 덮밥이다. 육식파인 지훈의 취향을 생각한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예슬의 특식 도시락.

 “와, 지훈 씨 누나 도시락 가게 하시라고 해. 이런 도시락이면 나 맨날 사 먹을 것 같아.”     

 편의점에서 사 온 도시락 비빔밥을 섞으면서 말하는 대리 영호와, 다이어트를 하겠다면서 샐러드에 아몬드 우유를 매일같이 싸오는 경영팀 매니저 채은은 회사에서 항상 점심을 먹는다. 월요일마다 이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지훈의 도시락을 이제 이 두 사람도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다.

  하루 종일 재 놓았다는 고기는, 과연 간이 제대로 배었다. 그 위에 직접 볶은 고소한 땅콩가루를 살살 올린 센스, 달큼하면서 짭조름한 고기에 새콤하게 절인 오이, 반숙으로 삶은 달걀의 조화가 완벽하다. 고기를 한 점씩 나눠주는 지훈. 사진 찍는 감성 같은 건 없는 지훈이지만 한 입 맛보니 안 찍을 수가 없다.     

 ‘오늘 도시락도 최고! 역시 고기반찬 먹으니 기운 나는 듯. 이거 먹으면서 생각한 건데, 자취 일단 보류할래, 누나 쉴 때 좀 얻어먹어야지.’     

  사실은 당장 독립할 단계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다. 도시락을 야무지게 밥 한 톨 안 남기고 먹은 뒤 지훈은 빈 도시락통을 가만히 바라본다. 녹록지 않은 신입사원 처지가 고스란히 씁쓸하면서도, 결정하고 나니 일단 마음은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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