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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누나 Mar 24. 2024

칠십 사일. 때로는 확실한 것이 필요해서

생선양념구이


독서와 글쓰기, 운동은 꾸준함을 요하면서 그 빛을 발하는 순간을 맞이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 않으니 실력이 쌓이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그렇지 않을 때보다 많은 게, 나뿐만은 아닐 테지.

특히 혼자 이러한 것들을 지속하고자 함은 내가 스스로에게 자극과 피드백을 줘야 하는 스트레스,

어쩔 수 없는 주관성을 배제할 수 없어 부딪히는 한계,

그 지점에서 돋움대를 찾지 못했을 때 느끼는 절망.


그래서 임신 중 뭐 하나라도 손에 쥐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던 바,

언제 어디에 쓸지 몰라도 양식, 한식조리사자격증을 공부하듯 시도해 보기로 했다.

양식은 어느 정도 익숙했는지 공부하고 실습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던 반면,

한식은 사실 몇 년 전에도 두 번이나 학원을 다니며 시험을 치렀어도 쉽지 않았다.


한식 양념은 간장 또는 소금에 설탕, 후추, 다진 마늘과 파, 깨, 참기름 그리고 고추장이나 고춧가루가 전부라 이론적으로 보면 양식보다 간단해 보인다.

그런데 실기 메뉴에는 탕평채, 섭산적, 표고전, 화양적 등 오늘 우리 밥상에 올라가지 않는 요리들이 절반 정도,

잣가루 고명과 석쇠를 이용해 가스불로 조리하기 등 평소 하지 않는 작업이 많아 쉽지가 않은 것.

길이와 폭을 맞춰 예쁘기 시간 내 만들기도 꽤 어렵다.


올 초, 양식조리사를 먼저 따고 나서는 자신감이 조금 생겼는지 한식도 혼자 해보겠다고 시작했다.


“못 따도 할 수 없지. 칼질 연습 좀 한다고 생각하고.”


라고 남편에게 가벼운 듯 말했지만, 시험이 다가올수록 은근한 무게가 나를 눌러옴을 느꼈다.

동영상으로 조리 순서를 익히고 주의사항을 점검하며 또 혼자서 재료를 사서 연습을 하고 있자니(그래도 요즘은 영상으로 공부가 가능해졌으니 할 만하다)

한 달 반 가량 하루에 두세 시간씩 꽤 많은 에너지를 들이고 있었기에, 내 시간과 노력에 대한 대가를 받고 싶어지는 인지상정.

별로 먹고 싶지 않은 음식 재료를 사서 만들기까지 하면 버리기는 너무 아까워,

어떻게든 조미료를 보강해 끼니로 해결한 내 식단도 조금 억울하다고!

특히 생선 요리를 선호하지 않는 남편인데 시험 덕에 한 달 동안 생선전, 생선구이, 생선찌개 등 다양하게 먹을 수밖에 없기도, 하하.

(이 부분에서 남편은 한 번에 시험 합격을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시험 당일이었던 2주 전, 남편의 출근으로 나는 혼자서 보따리 같은 짐을 가지고 시험장에 가야 했다.

은근히 무거운 짐과 시험 전 약간의 긴장으로 배뭉침이 살짝살짝 왔지만,

‘우리, 같이 잘해보자 아가야.‘

다독이면서 아침 첫 시험조로 무사히 시험을 치렀다.

시험 한 시간 동안 부드러운 속도와 흐름으로 조리하면서 연습을 하는 둥 마는 둥 허투루는 안 했나 보다,

‘이번에 통과하지 못한다 해도 실제로 실력 향상이 있는 걸로 만족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 편히 시험장을 나왔다.


그리고 예정보다 하루 일찍 오늘 합격 공지가 올라왔고 다행히

합격했다.

소파에 누워있던 남편에게 총총 달려갔더니

“왜, 왜. 뭐야…. 오! 잘했네, 축하해요. 우리 조리사님.“


고시 합격도 아닌데 호들갑 떨 것까지 없었지만 오래간만에 ‘획득한‘ 자격증에 조금 신은 났다.

여보, 오늘은 한식 말고 파스타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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