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
와비와 사비라는 두 단어가 합쳐져 하나의 개념이 된 ‘와비사비’. 생전 처음 만나는 단어와 개념을 오늘 접한 책에서 맞이했다.
사전에도 정의되어 있지 않고, 일본인들 중 많은 이도 정확히 설명을 못한다고 하는 이 개념의
‘와비’는 단순함, 겸손함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을, ‘사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기는 정취, 시간의 덧없음, 아름다움, 진정함이라고 책에서는 말한다.
그럼에도 매우 추상적이라 와닿지 않아 책장을 조금 더 넘겨보게 된다.
말린 꽃이나 나뭇가지,
금이 가거나 이가 빠진 그릇,
.
.
.
유행을 타지 않는 옷과 늘 손이 가는 오래된 물건들,
매끄럽고 획일적이지 않은 표면,
어룽거리는 불빛.
저자는 친절하게 ‘와비사비’에 해당하는 것들을 몇 가지 적어두고,
이를 삶에 가깝게 실천하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집에 있다 보니 세상사에서 너무 멀어질까 봐(소외되고 싶지 않은 불안함) 신문이나 경제, 실용서 위주로 책을 보다가 오래간만에 도서관에서 집어든 포근한 에세이.
평소 디카페인 라테가 있는 카페에 아이패드를 들고나가다가,
오늘은 편한 가방에 물 한 병 넣어가지고 동네 도서관을 찾았다.
햇볕도 바람도 좋아 도서관으로 걸어가는 길도 상쾌했고, 각자의 독서에 집중하고 있는(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이들 사이에 나는 나만의 책 세상에 빠져들었다.
이런 순간도 ‘와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여유로운 순간, 편안한 기분 정도로 ‘스치는 감정’이라고 생각했지, 종교적이지 않으면서 삶과 태도에 녹아들게 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인 적은 없어 생소하게 신선했다.
도서관 앞에는 유명한 김밥집이 있다.
책을 대여해서 나오는 길에 김밥이 먹고 싶어 잠시 멈춰 섰으나 와비사비 여운이 남아 수수하고 겸손한 내 김밥을 말아먹고자 집으로 향했다.
요즘 김값이 금값이라는데 금값 되기 전 사둔 좋은 김에 잡곡밥은 참기름과 소금 간을 약하게 해서 펴 바른 뒤,
당근과 오이는 채 썰고 양배추에 맛살을 마요네즈에 섞어 하나하나 올려 적당히 도톰한 김밥 한 줄을 말았다.
당근만 가볍게 볶아내서 너무 기름지지 않으면서 양배추와 오이로 아삭함을 살리고 엄마가 보내주신 우엉을 몇 개 얹어 단무지 대신으로 삼는다.
한 줄 김밥을 먹으려고 재료를 손질하는 건 다소 귀찮은 일이지만 오늘은 나와 아가 둘 만의 느긋함을 가져보기로 했다.
내가 만든 김밥 하나하나는 일정하지 않고 유행을 타는 스타일도 아닌 소박함 그 자체.
왠지 오늘 하루를 잘 보낸 것 같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