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 아는 호떡의 맛
딱 엄지와 검지로만 잡을 수 있을 만큼 작게 자른 두꺼운 종이 사이에 끼워주는 도톰한 호떡. 공기 반 기름 반 호떡을 손에 받아 들면, 쫄깃한 첫 한 입을 다 씹어 삼키기도 전에 두꺼운 종이가 기름을 먹어 손가락도 미끌거린다. 개의치 않고 설탕과 땅콩이 섞인 달콤함을 맛보기 위해 아직 뜨거운 그것을 얼른 베어 문다. 마지막 남는 한 입은 달콤하지도 더 이상 따뜻하지도 않은 기름 맛 작은 덩어리지만 입에 쏙, 아쉬움의 입맛을 다시는 것이다. 반질거리는 입술과 손가락을 닦아주시면 나는, 삼촌 손을 잡고 할머니 댁으로 비로소 돌아가곤 했다.
조카가 열 명도 더 되는 외삼촌이셨다. 나는 삼촌의 첫 조카도 아니다. 그런데 삼촌은 나를 유독 예뻐서 어쩔 줄 몰라하셨다. 내 위로 언니가 둘이고 나보다 한 살, 세 살, 여섯 살 어린 사촌 여동생들이 있는데도 말이다. 사실 나는 지금도 왜인지 잘 모른다. 여쭤볼 생각을 한 적이 없었고, 지금은 여쭐 수가 없다. 외할아버지가 수년간 나라의 대표로서 지켜오신 문무대왕릉이 잠든 경주 바다, 그곳에 외삼촌도 뿌려지신 지 2년째가 되는 해다.
“우리 안경다리 아가씨! 삼촌이 너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아나, 모르나? 전화도 자주 안 하고, 가시나.“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안경을 쓰게 된 나였다. 나는 솔직히 안경 쓴 내 모습이 참으로 별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삼촌이 나를 ‘안경다리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도 탐탁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를 그렇게 예뻐하는 삼촌한테 싫은 소리를 할 만큼 나는 모진 아이는 아니었나 보다. 그것은 삼촌만이 나를 부르는 유일한 별명이기도 했다.
삼촌은 우리 엄마에게도 많이 ‘아픈’ 동생이었다. 5남매 중 유일한 딸인 엄마는 터울 7살의 남동생인 삼촌을 업어 키우셨다. 따뜻한 햇살 아래 엄마가 마당에서 빨래를 널고 있던 그 날 아침, 모든 것이 바뀌었다. 갑자기 자지러지게 우는 동생 소리를 듣고 다급히 방에 들어가 보니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고 했다. 일 나가신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곧바로 전화를 해서 병원에 갔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겨우 세 살 나이, 소아마비 판정을 받은 삼촌은 숨이 붙어 있던 것이 기적이라 했을 만큼 작은 몸으로 커다란 고비를 넘겼다. 그 후로 왼쪽 몸을 못 쓰게 되었고, 우리 엄마는 마치 본인 탓인 듯 그렇게 하염없이 우셨다.
고열이 지나간 자리는 삼촌의 머릿속에도 남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삼촌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한글을 겨우겨우 읽고 아주 간단한 산수만 하실 수 있었다. 삼촌이 밥벌이를 할 수 있었던 일은 우유나 신문 배달 정도였다. 매일 새벽 식구들이 깨기 전, 온 동네를 돌면서 신문 배달을 10년 넘게 하셨다.
나는 외가에 가면 그 고요한 새벽에도 빨딱 일어나 삼촌의 오른손을 잡고 따라나섰다. 삼촌의 불편함 몸을 창피하게 여긴 적은 없었다. 처음 마주한 삼촌의 모습이 그러했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할 틈이 없었달까. 신문 배달 도중 우리는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에 적힌 한글을 같이 읽어보기도 하고, 배달하는 집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나오셔서 인사를 나누다 보면 배달 시간은 기약 없이 길어지기도 했다. 신문 배달을 하는 집들은 모두 이웃사촌들, 삼촌은 내 소개를 절대로 빼먹는 법이 없었다.
“야가 서울에서 공부 잘하는 내 조카예요. 예쁘지요?”
"알았다 알았어, 이제 고만 가라, 마!"
듣다 못한 할머니가 손을 내저으실 때까지 자랑을 하셔서 나는 얼굴이 다 붉어질 정도였다. 내가 다 자라서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야가 저기 멀리 외국에서 일하는데 삼촌 본다고 여기까지 왔습니더, 예쁘지요?"
삼촌 팔을 힘껏 당겨야만 겨우 따라 나오셨다. 내 팔뚝보다도 얇은 앙상한 팔이었는데 힘은 대단했다. 일이 어찌어찌 다 끝나면 여름에는 아이스크림을, 겨울이면 호떡을 사주시곤 한 것이다. 어렵게 번 작은 돈으로 조카에게 맛있는 간식 사주는 행복을, 어린 나였어도 은연중에 마음으로 알았다.
"누나가 해준 호떡 묵고 싶다 아이가. 언제 내려와서 해줄 거고?"
함께 사 먹는 호떡은 그것대로 즐거웠지만 삼촌은 우리 엄마가 만들어주는 호떡을 더 좋아하셨다. 그러니까 사실 내가 자주 먹던 엄마표 호떡은 삼촌이 먼저 알던 맛이다.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게 되자 딸이라는 이유로 학교를 오래 나가지 못한 엄마. 나머지 형제들이 등교를 하면, 집에 남겨진 엄마와 삼촌 둘이 있을 때 엄마는 호떡을 자주 구우셨다. 엄마는 결혼 뒤 남편과 아이들, 우리들을 위해 더 많은 호떡을 만드셨다.
이스트 없이 찹쌀을 불리고 갈아서 밀가루와 적당히 섞어 만드는 엄마 반죽은, 사 먹는 호떡이 따라갈 수 없는 밀도 높은 외피를 탄생시킨다. 지금까지도 양봉을 하시는 외할아버지의 벌통에 꿀벌들이 날라다 온 아카시아 꿀과 황설탕을 섞어 넣는 호떡 소는 또 어떤가. 그야말로 꿀맛이다.
내가 성인이 된 이후 삼촌은 경주에서 서울까지 오는 길이 지구 한 바퀴를 도는 길보다 어려울 만큼 약해지셨다. 휴가 받으면 경주 내려가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데 삼촌은 급히도 가셨다. 대학 졸업 후 계속 해외에 있다는 핑계로 아득하게 멀리서 혼자서 삼촌을 보냈다. 그래서일까, 아직도 삼촌이 계시는 것 같다. 행여 다칠까, 아플까, 도둑놈 만날까, 통화할 때마다 신신당부를 하던 삼촌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지난겨울 호떡 장수를 보고 엄마는 ‘우리 원희, 호떡 해줘야 하는데. 누나 호떡 먹고 싶다고 그랬는데.’라고 집에 돌아와 이야기하며 눈물을 훔치셨다. 이제 나도 삼촌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먹지 못하는 음식이 호떡이 되었다.
한 평생 제대로 쓰지 못한 왼손과 왼발, 그 물속에서는 자유롭게 유영하시기를 바라고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