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당신, 당신은 나의 당근

케이크가 되고 싶었던 당근빵

by 파리누나

세계 어디를 가도 나에게 케이크를 고를 선택권이 있을 때면, 초콜릿도 딸기도 생크림도 아니고

나는 당근 케이크를 고르는 사람이 되었다.

당근 케이크를 맛본 최초의 기억은 스무 살 언저리인데,

제일 맛있다고 기억하는 건 의외로, 집 근처 동네 카페에서였다.

아마도 아직 당근 케이크를 많이 먹어보지 않아서, 였을수도 있고

카페 사장님이 과하게 친절해서였을 수도 있다.

비가 오던 오후, 혼자 과제를 하고 있었는데 비가 그치질 않던 그 날,

사장님은 먼저 다가와 우산을 빌려주셨다.

이렇게 예쁜 옷 다 젖으면 안 된다고.

대학시절 내내 가장 아끼던 연분홍색 자켓이었던 것까지 생생하다.

우산은 거의 한 달이나 뒤에 가져다 드렸던 것 같다. 돌려받을 생각도 안 하셨다면서, 맛있는 커피를 내어주시던 따듯한 분.


그 날처럼 오늘 파리에 모처럼 비가 하루종일 내리고 있다.

그래서 당근 케이크가 생각난다,

라고 난 시침 뚝 떼고 감성적으로 쓸 수도 있으나 사실은,

지난 주 단 것을 찾던 호르몬의 불균형의 결과일 뿐이다.


가벼운 생크림보다 진한 크림치즈도 좋고, 시나몬과 카다몸 향신료에도 거부감이 없다.

제일 딱딱한 채소 당근을 이렇게 달콤한 케이크로 변신시킨 점도 매력적이다.

거기에 어떤 견과류도 잘 어울리는 것도 좋아.


SAM_5643.JPG 구운 게 아니라 포슬한 케이크 시트지보다는 푹신한 빵이 되었다.커피보다는 홍차가 더 어울린다.




SAM_5649.JPG



완벽한 케이크 한 조각을 마음속에 그려봤지만

이 시기에 그런 사치까지 부리지는 않겠다.

달걀 하나에 황설탕, 시나몬 가루, 밀가루 조금, 당근은 넉넉히.

계량도 없이 대강의 반죽을 만들어 미니밥솥에 넣어 취사버튼만 눌러준다.

크림치즈 대신 진득한 그릭스타일 요거트에 꿀을 한 스푼 넣으면 집에서 만든 티 나는 프로스팅.




연상작용이 어찌되었든

만들어놓고 보니 그 동안의 당근케이크들이 스쳐 지나가고,

그리고 사실은 최상의 맛보다

그 안에 담긴 스토리가 더 강하게 남아있다는 오래된 진실을 상기한다.

케이크는 되지 못한 이 당근빵은 적어도,

위로든 외로움이든 어떤 형태를 가질 것만 같다.




keyword
이전 03화타인의 가족이 주는 고유한 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