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나의 마담 엘레나!

그 닭고기 수프는 어떤 맛일까

by 파리누나


프랑스 파리라고 말하면 열이면 열 부러운 내색을 감추지 못한다. 새로 시작한 공부로 지난겨울, 나는 파리에 오게 되었다. 두꺼운 점퍼를 아직 벗지 못하던 추운 2월, 매서운 바람과 바닥 난방이 없는 차가운 방에서 이불 두 겹으로 잠을 청해야 했던 밤들이었다. 나에게 파리는 사랑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낭만적인 도시로 보이지 않았다. 믿을 수 없이 작은 방이 입 떡 벌어지게 비싼 집값에 시내 중심에서 사는 일은 꿈도 못 꾸었다. 파리를 약간 벗어난 교외에 집을 구했고, 어둑해진 저녁에 익숙하지 않은 길로 귀가하는 시간이 무서웠다. 더구나 소매치기, 동양인 차별에 주의하라는 이야기를 많이도 듣고 온 터, 처음 전철을 타던 날 나는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가방을 꼭 붇잡았다.


등하굣길은 지하철로 편도 한 시간이 좀 더 걸린다. 학교 수업이 늦게 마친 그 날 저녁, 갈아타는 역에 도착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많은 노선이 지나는 환승역이라 항상 바쁜 곳이지만, 평소보다 사람이 많았다. 전철이 들어오고, 사람들을 따라 올라타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한숨이 뒤섞인 짧은 단어들을 내뱉으며 전철에서 내렸기에 영문을 알 수 없는 나는 일단 또 따라서 내렸다. 열차는 빈 채로 떠났고, 그 뒤에 온 열차와 그 뒤, 또 한 번 뒤... 계속 사람들을 토해만 내고 떠나버렸다. 시계는 밤 열 시를 가리켰다.

몇몇 사람들이 전화를 꺼내 들었고 아마도, 그들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상황 설명을 하는 듯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고, 해서 내가 평소보다 늦는다는 사실을 아는 이도 없었다. 아직 이렇다 할 친구도 없던 때라 집에 못 들어가는 일이 생긴다 해도 마음 편히 하룻밤 묵게 해달라고 부탁할 사람도 마땅치 않았다. 집에 가는 길이 걱정되다가 이내 그 순간은, 참 외로웠다.


삼십 분도 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총을 멘 경찰 대여섯 명이 나타났다. 어떤 안내 방송이 나왔고, 절반의 사람들이 우르르 출구를 향해 빠져나갔다. 이제는 안 되겠다 싶어, 누군가에게 물어보자. 주위를 둘러보는데 또 겁이 난다. 말을 붙이기도 어렵게 왜 이리 다들 차가워 보일까. 한참을 그렇게 오도 가도 못하며 혼자 끙끙대고 있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 보이는 한 아주머니 옆으로 살금 걸음을 옮겼다. 용기를 내어본다.

“저기, 실례합니다. 혹시 무슨 일인지 여쭐 수 있을까요? 제가 불어를 못해서요.”

영어에 대한 울렁증, 혹은 자국어 프랑스어에 자긍심이 넘친다는 프랑스인들이라고 들어서 영어로 묻는 것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어쩌랴. 하지만 아주머니는 꽤 유창하게 그리고 밝은 목소리로 받아주신다.

“이다음 역에서 수상한 물건이 발견됐다고 해요. 신고가 들어와서 지금 경찰들이 수색 중이랍니다. 마지막 안내 방송에서 앞으로 최소 30분에서 40분 소요가 될 거라고 했어요.”

“아, 그렇군요. 정말 감사해요...”

상황 파악은 되었지만 그러고 나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더 난감해졌다. 더 기다린다고 안내된 시간에 열차가 오리라는 보장도 없다는 게 아주머니가 덧붙이신 말씀. 걱정스러운 내 얼굴을 보시고는 아주머니가 어디에 사냐고 물으신다. 다른 경로나 교통수단을 알아봐 주시겠다는 거였다.

“버스는 보통 밤늦게까지 다니니까 아마 가는 게 있을 거예요. 나도 같은 방향이니까, 일단 함께 밖으로 나가지 않겠어요?”

달리 방도가 없던 나였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는 조그만 짐 가방을 끌고 계셨다. 출구를 향해 나가는 계단을 오르며 아주머니가 가방 드는 데 힘을 보탰다. 괜찮다고 무겁지 않다며 미소를 지어 보이시는데 그 미소에 안도감이 마음에 퍼짐을 느꼈다.

밖으로 나왔더니 큰 역인 만큼 넓은 도로가 이리저리 사방으로 뻗어있다. 택시가 줄을 지어 서 있고,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아이처럼 아주머니 뒤꽁무니에 바짝 붙어 길을 건넜다. 이 낯선 도시에서 내가 믿을 사람은 아주머니뿐인 것처럼 말이다.


휴대폰으로 검색을 몇 번 더 해보시더니, 이내 결단했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시간도 너무 늦었고, 어차피 나는 짐도 있으니 택시를 타는 게 좋겠어요. 같은 방향이니까 같이 타요.”

나는 조금 당황해서 우물쭈물 대답을 곧바로 못하고 있었다. 파리에서 택시를 타 본 적이 없어서 택시비가 얼마나 나오려나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혼자 버스를 타고 가는 건 더 엄두가 안 난다. 이내 아주머니가 잡은 택시에 덜컥 같이 올랐다.


“파리에는 여행 온 건가요?”

조금 안정이 되고 난 후 비로소 우리는 서로에 대해 묻고 이야기를 했다. 여동생을 만나러 스위스에 며칠 다녀왔다고 하셨다. 파리에서 이런 예기치 못한 교통상황은 생각보다 흔한 일이니 집에 가는 버스 노선을 꼭 알아두라는 팁을 주시기도 했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니 개선문과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 센 강 건너 에펠탑이 밤하늘 아래 빛나고 있다.

“파리에 산 지 이십 년이 다 되어가지만 이 풍경은 매번 감상에 젖게 하죠.”

파리에 와서 처음 보는 에펠탑이었다. 학교 일정이 빠듯해서 아직 파리를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 때였는데, 택시 안에서 보다니 참으로 기분이 묘했다. 에펠탑이 내뿜는 주황빛이 따뜻했다.

아주머니가 먼저 내리게 되는 경로였다. 한사코 택시비는 거절하시며 내리시기 전 택시비를 먼저 지불하셨다. 그리고 그 다정한 미소와 함께 손을 내미셨다.

“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 아닌가요? 나는 엘레나라고 해요. 오늘의 기억이 파리를 추억할 때 아주 작게나마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게 된다면 나는 족해요. 조심히 가요!”




아주머니는 프랑스 음식 중 닭고기와 함께 여러 가지 채소를 넣고 오랫동안 보글보글 끓인 수프를 가장 좋아한다고 하셨다. 아주 프랑스다운 음식이면서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기는 가정식이라고. 음식 이름을 말씀해주셨지만 집에 돌아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어려운 불어 발음의 이름은 도저히 생각이 안 난다. 수십 개 검색을 해봐도 확신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 뒤로, 어떤 닭요리라도 접하게 되면 나는 마담 엘레나를 떠올린다. 그 닭고기 수프는 아주머니가 베푸신 친절만큼 따뜻한 음식 이리라.

파리 도시 전체가 나에게 미소 짓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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