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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의 기억 창고 '제주 그림' 어떤가요?

#14 제주도립미술관 & 장리석기념관

by 향기나
가끔은 소란한 도시를 벗어나 너른 바다의 품안에 고립되어 있는 한적한 섬으로 가고 싶지 않나요? 고요하고 무심한 정적은 같은 일, 같은 풍경도 색다르게 포장해 기억 창고에 넣어줄 것입니다.


제주 도립미술관에 가면 장리석 상설 기념관이 1층에 있다. 1916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장리석은 1951년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서 피난 와 제주에서 3년간 살게 되었다. 그는 제주의 자연과 사람들, 특히 해녀와 농민들, 그리고 초가집 풍경에 깊은 감흥을 받아 100여 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다.


그에게 제주는 단순한 피난처 이상의 정서적 안정을 준 공간으로 기억되었다.

“제주는 내게 있어 고통과 위안을 동시에 준 곳이다.”


장리석은 생전 제주도에서 그린 자신의 대표작 110여 점을 제주도에 기증하였다. 2009년 제주도립미술관이 개관하면서 그 안에 ‘장리석 기념관’을 설치하게 되었고 작품을 교체하여 상설전시를 한다. 그의 고향 안동에는 장리석 미술관이 있다.


그는 전통과 현대, 동양화와 서양화를 넘나드는 가교 역할한다.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정직한 눈’으로 평가받는 대표적인 사생화가이다.



지난달, 내가 갔을 때는 기증 20주년을 맞은 상설 전으로 주제는 ‘남국일기(南國日記)’다. 제주 피난 생활을 그린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그의 그림은 묵직하면서 고요하고 투박한 듯 섬세했다. 붓으로 일기 쓰듯 피난의 기억을 그림으로 담아냈다. 이방인의 낯선 삶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주변을 그리고 나를 어루만진 기록 같았다.

물질하는 해녀들의 자연스러운 일상과 육아와 일로 지칠법한 생활이지만 담담히 견디는 모습이 전쟁 당시 삶을 이겨내는 억척스러운 엄마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바람에 휘날리는 억새들, 돌하르방, 구불구불한 밭, 산방산은 말이 없고, 노을은 여전히 붉고 아름답다.


장리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제주를 두려움의 장소가 아니라 그리움의 대상으로, 자기화된 풍경으로 그렸다. 밝아진 색채와 무딘 붓터치로 해녀들의 얼굴엔 인내와 무던함이 깃들었다. 강렬한 원시적인 아름다움은 고갱의 타이티를 연상시킨다. 그의 시선은 고통과 연민, 낯섦과 사랑의 사이 어디쯤에 있는 듯했다.


《남국일기》는 결국 제주의 매일을 기록한 그림일기다. 그 속엔 바다가 있고, 해녀가 있고, 상처받은 예술가의 고요한 울림이 있었다.






'남국 제주기억이 장리석의 것이었다면, 내 마음의 기억은 최북단 교동도가 아닐까?'


2014년 여름, 교동도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서강대학교에 근무하시는 교수님이 은퇴를 앞두고 '퇴직 후 어디가 제일 살기 좋을까?'를 전국으로 찾아다니다 먼먼 섬, 교동에 있는 우리 학교까지 오셨다.


교수님 전공이 철학이라고 하시며 교동 와서 살게 되면 우리 학교에 와서 재능기부를 하고 싶다고 이것저것 물으셨다. 교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가시는 길에 교감인 나에게 부탁을 한 가지 하겠다고 하신다.


교동 오는 길에 차에서 MBC 라디오 <강석ᆞ김혜영의 싱글벙글 쇼>를 들었는데 거기에

<갈비 뜯고 갈게요>라는 코너가 있다고 나보고 사연을 써서 보내라는 것이다. 나는 "네." 하고 짧게 대답은 하였지만 대낮에 하는 라디오 방송이라 근무하는 내가 들을 수 없는 프로그램이어서 듣는 순간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런데 한 2주 후 그 교수님이 다시 우리 학교를 찾았다. 알고 싶은 것을 물어보신 후에 사연을 보냈냐고 물어보셨다. "아니요. 낮시간에 하는 거라 우린 들을 수도 없어요." 했더니 "아니, 그래도 아이들을 위해 교감선생님이 사연 보내서 갈비를 타면 좋잖아요." 하셨다. 그 말을 듣고도 바쁘기도 해서 또 생각 속에 넣어두지 않았다.


여름방학이 되었다. 선생님들은 돌봄 교실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조를 짜서 방학 중에도 근무를 한다. 내 근무일에 교무실에서 라디오를 틀고 일을 하다가 문득 교수님 얘기가 생각났다. '뽑히기 어렵겠지만 한 번 써볼까? 갈비 잔치를 하면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겠지?'


컴퓨터를 켜고 MBC 게시판을 찾아들어가 신청하는 곳을 보았다. 사연이 엄청 많이 올라와 있었다. 하루에 한 명 선정해서 주는 건데 하루에도 몇 십건, 백 건 가까운 사연들이 당도해 있었다. '우와~ 경쟁률이 엄청 높다. 잘 써야겠네.' 승부욕이 생겼다.



당시 우리 학교는 전교생이 45명이었다. 복도에 설치된 역사관을 살펴보면 역사도 100년이 넘고 한해 졸업생만 해도 몇백 명일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교생이 시내 학교 두 학급도 안 되는 인원이다. 그중에는 이혼 가정, 조손 가정, 다문화 가정이 많아 아침 돌봄, 정규 수업, 저녁 돌봄까지 운영했다. 학교에서 가까운 아이들은 걸어오지만 대부분 동네에 뜨문뜨문 살고 있어 아침. 저녁 통학버스를 타고 등하교한다.


학교에서는 아침을 안 먹고 오는 아이들에게 아침 식사를 제공했다. 저녁 돌봄에서는 방과 후 수업을 여러 가지 하고 숙제도 학교에서 한다. 운동과 독서도 하고 8시에 학교 통학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세 끼를 모두 학교에서 먹는 아이도 있고, 두 끼는 기본으로 먹다 보니 학교 생활이 아이들의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내가 발령 날 당시 교동도는 다리가 놓이기 전이라 창후리에서 배를 타고 교동으로 들어왔다. 제과점도 없고, 갈빗집도 없고, 학원이나 변변한 카페도 없었다. 교동시장 주변으로 어른들의 식사나 술 위주의 식당, 다방이 있을 뿐 아이들이 좋아하는 갈빗집, 맥도널드 같은 햄버거 가게 하나 없었다.


돌봄 교실에서 늦게까지 생활하는 우리 아이들과 밤늦게까지 고생하는 선생님들에게 새 학기에 갈비 먹고 힘내서 공부하게 갈비 좀 보내달라고 사연을 보냈다. 나는 아주 간절하고 최대한 가엾게 사연을 썼다. 그러나 100% 사실이었다.



새 학기가 되어 잊고 있을 무렵 작가에게 전화를 받았다. 사연이 채택되어 내일 생방송을 하는데 내가 사연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 분량에 맞게 내용을 좀 줄였다고 하며 대본을 보내주었다. 리허설을 한다며 나보고 한 번 읽어 보라고 했다. 아이들을 오래 가르쳐 성대가 약해진 낮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작가는 갑자기 중지시키더니 "선생님, 우리 방송은 1시 반 넘어서 나갈 거예요. 점심 먹고 나서 엄청 졸린 시간에 그런 나긋한 목소리는 안 돼요. 더 방방 띄워주세요." 했다.


'엥~ 수다스럽게 방방 띄우라고. 그런 거 잘 못하는데 어쩌지?' 나는 어색했지만 톤을 높여 최대한 경쾌하게 다시 읽었다. 마침내 오케이가 떨어졌다. "네 좋아요 선생님, 내일 생방에서도 그렇게 해 주세요."


전화를 끊고 나는 대본을 들고 교무실 옆에 빈 과학실로 가서 몇 번이나 연습했다. '최대한 유머러스하고 신나고 즐겁게~' 평소 나와 맞지 않는 연기를 해야 했다. 아이들에게 고기를 먹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어렵게 채택됐으니 이제 한고비만 넘기면 된다.



다음 날이 되었다. 나는 소음을 없애고자 아무도 없는 과학실에 가서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학년은 오후 수업이 있어 사연 읽는 동안만 교실에 방송이 나갈 수 있게 방송 담당 선생님께 부탁드렸다. 드디어 <갈비 뜯고 갈게요>라는 코너 차례가 되었다.


"오늘은 저 멀리 민통선 안에 있는 교동도에서 교감선생님이 사연을 보내 주셨습니다. 어떤 사연인지 들어볼까요?" 사회자의 소개가 있은 후 이제 내가 사연을 읽을 차례이다. 몸짓이나 표정 없이 목소리만 연기하면 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하며 열심히 오버해서 사연을 읽었다. 전국으로 우리 학교 사연이 방방 띄운 내 목소리로 전파를 탔다.


그 후, 두 사회자의 사연에 대한 리액션이 오갔다. 강석이 연산군 유배지에 대한 물음도 하고 아이들에 대한 질문도 이것저것 해서 나는 생각나는 대로 대답을 했다. 드디어 코너를 마치며 갈비를 주는 시간.


"지금까지 이 코너에서 20인분의 양념갈비를 주었습니다. 오늘은 사연이 너무 감동스러워 ○○초등학교 전교생이 잔치를 할 수 있도록 특별히, 정말 특별히 갈비 50인분을 쏘겠습니다"라고 강석이 외쳤다. 교실에서 아이들의 환호성이 크게 들려왔다.



드디어~** 갈비 60대 6박스가 도착했다. 아이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학교 안 공터에서 돗자리를 펴고 갈비 잔치를 하기로 했다. 학교 텃밭에서 키운 상추와 오이 등도 준비하고 늘 학교를 위해 애써 주시는 학부모님도 몇 분 모셨다.


오늘 전교생은 줄넘기대회가 있어 오후에 강화읍에 있는 체육관에 갔다.

아이들이 하나도 없는 동안 나와 돌봄 선생님과 유치원 선생님은 잔칫상을 준비했다. 풍선도 불어 꾸미고, 현수막도 걸었더니 한결 분위기가 좋아졌다. 줄넘기대회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 갈비냄새와 생각지 못한 이벤트에 깜짝 놀랐다.


아이들은 학년별로 자리 잡고 고기를 먹으며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방송에 나왔던 얘기도 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우리 학교 제일 개구쟁이 승현이가 나를 불렀다. 상추에 고기 한가득 넣어 쌈을 싸서 내 입에 넣어 주며 말했다. "교감선생님, 오늘 너무 행복해요. 교감선생님 덕분이에요."


엄마 없는 외로움을 학교 와서 매일 말썽으로 풀어내던 승현에게 이런 자상한 매력이 있다니 너무 사랑스러웠다.


갈비는 실컷 먹고도 남았다. 아이들이 행복해하니 나는 더없이 좋았다. 장리석 화가처럼 교동 섬에서의 생활은 내 삶의 소중한 기억 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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