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이응노미술관
여행하기 어려운 더운 여름, 전국이 연일 불볕이다. 그나마 시원한 곳을 찾다가 정한 곳이 계족산 황톳길 걷기였다. 장태산 자연휴양림에서 하루 묵고 대전에 있는 미술관 두 곳을 여행하기로 했다.
2007년 5월 대전시가 이응노 유족으로부터 작품을 인수하여 이응노미술관을 개관하였다.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고암 이응노의 삶과 예술세계를 기리고 전승하기 위해 설립된 공립 박물관이다.
프랑스 출신 로랑 보두앵이 설계했는데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과 한국건축가협회상을 수상할 만큼 건축미도 세련된 미술관이었다.
이응노는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이자,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독창적 작가이다. 1904년생인 이응노는 일본·프랑스를 오가며 동양과 서양의 예술을 융합한 세계적 작가로 성장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파리의 동양화가’로 불릴 정도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응노 화백의 작품은 그가 태어난 홍성 이응노 생가기념관에서도 그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예산 수덕사에 가면 그가 매입하여 그의 부인 박귀희여사가 운영하면서 파리 출국 전까지 작업실로 사용한 수덕여관이 있는데 암각화 등 그의 작품 흔적을 볼 수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수많은 인물 형상을 단순화한 군상 시리즈와 문자추상을 만날 수 있다. 그는 문자와 형상 사이를 넘나드는 붓질과 색채 실험을 통해 추상미학의 독창적 경지를 개척했다.
이응노 화백의 대표작 「군상(群像, Crowd/Pleople) 시리즈는 그의 예술 세계에서 가장 상징적이며 철학적인 작품이다. ‘무리 지은 사람들’을 뜻하는 ‘군상(群像)’이라는 말처럼, 하나의 개별 인물이 아닌 집단을, 특별나지 않은 보편성을 주제로 한다.
그림 속 사람들은 얼굴도, 손도, 눈도 없다. 오직 붓 획으로만 구성된 인물들의 다양한 동작이 반복되며 집단을 이루고 있다. 그 단순해 보이는 선들을 살펴보면 놀랍도록 다양한 감정들의 소용돌이가 느껴진다. '따로 또 같이' 느낌이다.
절규하듯 소리치는 모습도 보이고, 저항하듯 웅크린 형상들, 떠밀리듯 어딘가로 걸어가는 사람들도 느껴진다, 이들은 그 자체로 ‘집단의 소리 없는 외침’이고, ‘시대의 흔적’이다.
그림을 보노라니 정치인들만 많고 정작 국민을 위한 정치인이 없는 대한민국
정치인들의 소리는 크나 정작 국민을 위한 소리는 들을 수 없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대한민국 정치인들은 국민을 제대로 이끌고 있는 것인가?'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는 군중들의 모습이 국민들의 소리없는 아우성이며, 현시대의 흔적 같다.
이응노가 군상 시리즈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건 그가 억울한 정치적 이유로 투옥된 이후였다. 언뜻 비슷하게 보이는 형상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기 다른 동작과 간격, 농담이 있다. 그는 같은 사람을 그린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서로 다른 사람들’을 그렸다.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무리 속의 닭들 가운데 있는 한 마리의 학'이다. 달리 말하면 많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돋보이는 인물, 탁월한 실력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이응노 미술관에서 본 '군상 시리즈'는 분명 두드러짐 없는 각기 다른 사람이었다. 작품 안에 있는 수백 명의 사람들을 보노라니 그곳에서 군계일학처럼 빛나는 사람 이응노 화백이 보인다.
이응노는 전통 서예에 기반을 두고 출발했지만, 한문 붓글씨에서 현대적 문자추상으로 넘어가고, 나아가 군상 시리즈 같은 정치적 메시지의 미술까지 탐구했다. 끊임없는 변화와 도전으로 시대를 앞선 유능한 예술가이다.
40대 중반에 일본으로 유학하여 문인화·서예 발전시켰고 55세에 프랑스 파리 유학해 서양 추상미술과 동양적 문자 결합하였다. ‘문자추상’이라는 독창적 장르로 파리 화단에서 독보적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나이와 경력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했던 점은 군계일학의 모습이다.
그는 파리에 '파리동양미술학교'를 세웠는데 이는 유럽 첫 동양미술 학교였다. 유럽인들에게 붓과 먹, 서예, 그리고 한국화를 가르쳤고 약 3000여 명의 제자를 양성하였다.
동베를린 사건. 그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떠난 여정에서 ‘반공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한국에 송환되어 2년간 감옥에 있었다. 감옥에서 그는 붓 대신 쌀죽과 콩물을 써서 그리기도 했고, 그 속에서도 인간과 자유, 존재의 문제를 놓지 않았다. 유독 돋보이는 이유이다.
대전에 오니 학처럼 빛나는 또 한 사람이 있다, 조웅래 맥키스컴퍼니 회장이다. '서장훈의 이웃집 백만장자'에 출연했을 때 그의 생각과 행동이 평범하지 않음에 신선했다.
어제 계족산에서 맨발 걷기를 할 때 조웅래 회장의 희생과 노력이 담긴 황토를 밟으며 한 사람의 노력으로 수백만 명이 감동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한 그의 예지에 손뼉 쳤다.
계족산을 맨발로 걷다가 돌밭으로 고통을 겪은 후 맨발 걷기와 힐링 문화 조성을 위해 2006년부터 계족산에 황토를 깔기 시작했다고 한다. 첫해 2만 톤의 황토를 깔았고, 이후 매년 약 2,000t씩 추가 보충. 현재도 그는 직접 현장을 찾아 정성을 쏟고 있다니 군계일학의 모습이다.
계족산 황톳길은 한국 최초이자 최장 규모의 맨발 걷기 황톳길로, 전국적 맨발 걷기 열풍의 시초가 된 곳이다.
현재는 연간 100만 명 이상 방문하는 ‘맨발 걷기의 성지’로 자리 잡았다.
황토 조성 및 관리비용은 매년 약 10억 원 규모. 전액 사비와 회사를 통해 지원하며, “계족산에선 대통령보다 유명하다”는 말까지 듣는다고 한다. 칭송받아 마땅한 일을 해내셨다.
이젠 단순한 트레킹을 넘어선 힐링사업도 생겼다. 숲 속 음악회(‘뻔뻔(funfun) 클래식’), 맨발축제, 마라톤 대회 등 시민들의 문화·건강을 위한 프로그램도 사랑받고 있다.
소주를 팔아 벌은 수익으로 남의 산에 200억원을 들여 14km에 황톳길을 만든 조웅래 회장님. 그의 황토 기부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맨발 걷기 후 선양소주를 몇 병 샀다. 황톳길의 발전을 위해 앞으로도 쭉~ 애주가의 길로 들어서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