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더현대 Alt1
따스한 봄 햇살이
열린 창문으로 집안 가득 스며드는 오후,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잔잔한 클래식 음악과 함께 커피 한 잔 어떤가요?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는 순간입니다.
이처럼 평화롭고
정겨운 풍경으로 보는 이에게 도파민을 샘솟게 하는 작가가 있답니다.
앨리스 달튼 브라운!
그녀의 나이는 올해 86세,
미국 현대 사실주의 화가에 걸맞게 그녀의 세심함은
'잠시 멈춤'과 '심신의 안정'을 선사합니다.
더현대 Alt1에서 3개월간 전시되고 있는 앨리스 달튼의 작품은 크게 4개의 섹션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저는 전시 순서와는 반대로 현재로부터 과거로 작품 여행을 떠나볼까 합니다. 저를 따라 그녀의 작품에 '잠시 머물며' '심신의 평온'을 느껴보실까요?
Recent Works(2020~현재)
서정적이고 명상적인 스타일을 바탕으로, 빛과 공간에 대한 탐구가 깊어진 앨리스 달튼의 최근 작품들입니다.
한낮 창밖에서의 요란스럽고 찬란했던 빛은
창문 커튼 안으로 들어와 실내 공간 속으로 스며들며 느긋해집니다.
햇빛에 몰래 업혀 들어온 바람은 커튼에 숨어 숨바꼭질로 몸을 감추려 해 보지만 금방 그 존재를 들켜버립니다.
하늘거리는 커튼이 "바람 여기 숨었다." 금방 일러바치니까요.
이 고요한 평온은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행복 비타민이며 온몸의 긴장을 풀어주는 엔도르핀입니다.
고단한 하루를 잘 버텨내느라 파김치가 된 몸은 이 풍경 안에서 링거를 맞은 듯한 급속의 회복으로 몸과 마음이 이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요와 한참 맞닿아 있으니 내 눈동자 안에서 불고 있는 <바람의 취향>이 생각납니다.
바람의 취향 -조혜경-
나 한때 바람을 좋아했죠 -중략- 사내의 척추에 숨어든 숨결이 물방울 타고 해초 타고 결국 수돗물을 타고 우리 사무실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은 그 바람을 못 본척해요 하지만 콧등에 귓속에 옷자락에 감추고 퇴근하죠 그들은 집에 들어가지 않아요 거리엔 스카프가 날립니다 콧노래가 날립니다 높은 빌딩의 허리가 살짝 휘었다 돌아옵니다 한강 위 철교가 잠시 출렁입니다 아버지는 바람을 좋아했죠 그 바람이 아버지를 좋아했죠 당신들 눈 속에서 천천히 조그맣게 둥근 원을 그리며 돌고 돌고 또 도는 바람이 한때 나를 좋아했죠 -계간『시산맥』(2014. 여름)
이젠 찬란했던 해가 바다이불속으로 잠자러 갈 시간입니다. 하늘엔, 더 놀고 싶어 집으로 들어가기 싫어 버티는 아이처럼 해의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라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현란한 몸부림으로 세상과 하늘과 바다를 붉게 합니다.
얇은 레이스 커튼은 세상 안과 밖의 경계에서 마음을 반쯤만 열고 여느 때처럼 지는 해와 바다의 실랑이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바다와 하늘을 품은 큰 액자 같은 창은 나직이 혼잣말로, 떼쓰고 있는 해를 달래줍니다. '더 놀고 싶겠지만 푹 자고 내일 또 놀자. 나도 이제 쉬고 싶어.'
바람은 커튼 속에 여전히 숨어 퇴근하는 사람들을 지켜봅니다. 그들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요?
Nature Works(1998~2019)
시기의 작품입니다. 애리스 달튼은 빛과 공간에 대한 탐구가 절정에 이르렀고 자연과 건축적 요소의 조화는 더욱 섬세해졌습니다.
태양이 지고 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나뭇잎도, 바다도 실랑이하던 햇살에 물들어 발그레 달아오른 아름다운 순간이 찾아옵니다.
평온의 절정. 호흡이 느려지고 기분 좋게 밥과 술을 부르는 술시입니다. 가족과 함께, 친구와 함께 허기진 기력을 일상의 수다에 얹어 웃음꽃으로 채워봅니다.
어둠이 내려앉은 동네엔 또 다른 평온이 찾아옵니다. 평온은 삶의 의미를 찾는 데 중요합니다. 차분한 밤은 고요함과 인내심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외부 자극에 휘둘리지 않는 내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Transitional Works(1979~96)
이 시기에는 빛과 그림자의 섬세한 대비가 인상적입니다. 빛이 만들어주는 공간은 너무나 따사롭고 경쾌합니다.
과도한 햇살에 눈이 부신 날은 햇살이 빨리 시들어 버릴까 봐 아까운 마음으로 눅눅해진 빨랫감을 찾아봅니다. 빛 고운 고추도, 길쭉한 가지도 배 갈라 말리고 싶어지는 한낮입니다.
나만큼이나 고급진 햇빛을 좋아하는 이가 있으니 그는 먹음직스러운 햇빛으로 허기를 채운다고 했네요.
허락된 과식. -나희덕-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햇빛이 가득한 건
근래 보기 드문 일
오랜 허기를 채우려고
맨발 몇이
봄날 오후 산자락에 누워있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햇빛을
연초록 잎들이 그렇게 하듯이
핥아먹고 빨아먹고 꼭꼭 씹어도 먹고
허천난 듯 먹고 마셔댔지만
그래도 남아도는 열두 광주리의 햇빛!
Early Works(1961~78)
앨리스달튼의 초기 작품입니다.
건물 외관에 드리워진 색감과 명도 차이는 무게감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줍니다. 건축적 요소들이 애리스 달튼의 동네 분위기를 잘 표현해 줍니다.
햇살과 바람을 좋아하는 그녀는 이 담벼락에도 좋아하는 티를 냈습니다. 하늘거리는 무채색의 나뭇잎들 뒷모습에 바람이 숨어있습니다. 바람의 그림자는 한낮 유채색의 건물과 어우러져 담백한 표정을 보여줍니다.
도종환의 시처럼 바람도, 그리움도, 아픔도, 세월도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물 흐르는 듯 담백하게 살고 있는 앨리스달튼 동네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바람이 오면 -도종환-
바람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그리움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아픔도 오겠지요
머물러 살겠지요
살다 간 가겠지요
세월도 그렇게
왔다간 갈 거예요
가도록 그냥 두세요
앨리스 달튼 브라운의 초기 그림은 건물 외관의 건축미가 돋보였고, 점차 실내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명상적 분위기로 이끄는 그녀의 작품을 만나보았습니다.
공간은 바뀌었지만 햇빛과 바람은 늘 함께 하였고 실외와 실내의 경계에는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사실적인 커튼이 있었습니다. 전시 마지막에 그녀의 인터뷰가 나오는 동영상을 반복해서 보았습니다. 세 명의 아이를 키우며 미뤄 두었던 그림을 뒤늦게 다시 하면서 그녀는 늘 한결같았습니다. 그녀는 그림을 통해 현대인의 삶 속에서 '잠시 멈춤, 그리고 영원함'을 사색하도록 해 주었습니다. 내면의 평화와 공간의 감성을 전달하는 것에도 집중하였습니다.
전시장을 나오며 늦은 나이에도 열심히 색을 연구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녀를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앨리스달튼의 전시를 보면서 일렁이던 마음속의 파도를 글로 적어보았습니다. 전시의 제목 '잠시 그리고 영원히'처럼 잠시 본 그림으로 인해 여러분들 마음의 평온이 영원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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