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모리스위트릴로 & 조제프파커슨 & 모네
불청객 습도가 온몸을 감싸 불쾌지수를 올리는 여름, 시원한 물에 온몸을 풍덩하고 싶지만 그도 어려우면 눈을 보며 눈이라도 시원하게 해 볼까요?
첫 번째 눈 온 그림은, 모리스 위트릴로의 <눈 아래의 라팽 아질>이다.
모리스 위트릴로는 프랑스의 화가로, 몽마르트르의 풍경과 파리 외곽 서민촌 골목길을 주로 그렸다.
그의 어머니는 여류 화가 수잔 발라동, 위트릴로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생아로 태어났으나 스페인 출신 화가 미구엘 위트릴로에게 입양되면서 모리스가 되었다.
평생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알코올 중독으로 힘겹게 살았다. 그는 '몽마르트르의 시인'으로 불릴만큼 몽마르트르 거리를 풍경으로 많이 남겼다.
'라팽 아질'은 '민첩한 토끼'라는 뜻으로 몽마르트르 지역의 유명한 카페 겸 선술집이다. 피카소, 르누아르, 모딜리아니 등 예술가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
'알코올 중독과 정신병을 겪으며 어려운 삶을 살았던 위트릴로도 눈이 온 날은 이곳에서 소박한 위안을 받았겠지?'
두 번째 그림은, 조제프 파커슨의 <겨울날이 짧아지고 있다>이다.
조제프 파커슨은 스코틀랜드의 사실적이고 감성적인 풍경화가로, 특히 눈 덮인 겨울 풍경 묘사가 탁월한 작가이다. 스코틀랜드의 겨울 목장과 양 떼, 눈보라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과 동물들을 주로 그려 '냉동 양고기'라고 불렸다.
런던의 본햄스 경매장에서 그의 <겨울날이 짧아지고 있다> 그림이 약 2억 6천만 원에 낙찰되었다. 눈 덮인 목장에 저녁 햇살이 비치는 모습이 서정적이고 따뜻해 보였기 때문일까? 미국 최대의 카드 제조사가 이 작품을 크리스마스 카드로 만들었더니 폭발적인 판매를 이뤄냈다. 이 그림은 가장 인기 있는 크리스마스 카드가 되어 모든 이의 크리스마스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세 번째 그림은, 모네의 <눈 덮인 집>이다.
모네는 <수련> 시리즈뿐만 아니라 겨울의 정취와 빛이 내는 색채를 생생하게 재현한 <눈> 연작도 그렸다. 그의 눈 온 풍경에는 흰색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눈이 주변에 반사되고 투과되어 변화된 미묘한 느낌도 그의 방식으로 겨울 풍경을 잘 살려냈다. 인상주의 화가로서 빛의 효과를 극대화하여 추운 겨울이지만 우아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눈 온 그림을 보다 보니 어쩌다 TV에 나왔던 쑥스러웠던 추운 겨울이 생각난다.
2013년 늦은 11월, 교동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추위에 약한 나는 겨울이 싫었다. 섬의 겨울은 도시보다 두 배는 더 춥게 느껴지고 밤도 빨리 찾아온다. 갑작스러운 추위와 눈까지 내린다는 아침 뉴스를 보고 평소 출근할 때는 안 입던 스웨터와 달라 붙는 바지를 꺼내 꽁꽁 싸매고 출근했다.
학교는 사택에서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리에 있다. 수업 시작종이 울리고 북적거리던 교무실은 조용해졌다. 업무를 보고 있는데 오랜 세월에 닳아 둔탁해진 교무실 미닫이 문이 삐걱하고 조금 열리더니 누군가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가 사라졌다. 언뜻 본 봐로는 외진 섬에서는 보기 힘든 도시적인 사람 같았다. "왜 안 들어오지? 잘 못 찾아왔나?' 생각하며 컴퓨터에 시선을 묻었다.
10초도 안되어 아까 그 사람인 듯한 세련된 파커를 입은 젊은 남자가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시작하며 교무실에 들어섰다. 나이 드신 남자 한 분이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웬 카메라지?' 나는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로 오셨나?" 묻기도 전에 그들의 대본대로 질문이 먼저 들어왔다. 영문도 모르고 당황한 채 시작된 촬영이 이어졌다.
우리 학교의 역사도 묻고, 학습 자료실이나 창고에 가 볼 수 있는지, 오래된 교육자료가 있는지 물었다. 카메라가 계속 돌아가고 있어 대답을 열심히 해 주었다.
대답을 듣던 촬영기사 겸 PD가 나에게
"학교에서 뭐 하시는 분이셔요?" 묻는다.
"나는 교감이에요." 했더니 그는 깜짝 놀랐다.
"아, 교감선생님이셨구나." 하였다.
'내 옷차림이 교감스럽지 않나?' 생각했다. 매일 잘 입고 다녔는데 하필 오늘 이런 일이 생기다니.
촬영을 잠시 멈추고 KBS 인간극장에서 촬영 왔다며 취재 내용과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인간극장이 리얼리티를 추구한다고 하지만 사전 예고 없이 무작정 촬영이 시작되어 처음엔 말도 못 하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황당한 내 모습이 우스울 것 같았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며칠 전 교무실로 전화해 자세한 얘기 없이 학교가 역사가 깊어 촬영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함)
"이거 진짜 TV에 나오는 건가요? 아침에 춥다고 해서 이 외진 섬에 방문객이 있을 줄 모르고 날도 춥고 눈도 오고 행사도 없고 해서 대충 입고 출근했는데 저 정말 망했어요." 라며 사택이 가까우니 얼른 가서 갈아입고 오겠다고 했다. PD는 오히려 자연스러워 괜찮다며 안된다고 했다.
인간극장의 제목은 <풍금소리>이고 내년 1월 초에 방영된다고 했다. 김포 덕포진 박물관을 운영하시는 김동선 전직 초등선생님과 그의 아내 이인숙선생님의 이야기였다. 이인숙선생님은 교통사고로 시력을 잃고 앞을 볼 수 없게 되어 교단을 떠나신 분이다.
덕포진 박물관은 6.25 이후의 학교와 교실의 모습과 소품 등을 전시한 사설 교육 박물관이다. 난로에 양은 도시락을 올려놓고, 나무로 만든 책상, 걸상에 앉아서 옛 추억과 부모님들의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도 해주는 곳이라고 했다.
교육박물관에 전시할 자료를 수집하러 전국을 다니는 데 우리 학교 역사가 100년이 넘어 혹시나 하고 오신 것이라고 했다.
교장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창고를 구경시켜 드렸다. 창고에 오래 묵어있던 앉은키 재는 오래된 기구를 보자 반가워하셨다.
김동선 선생님은 나를 앉히시더니
"옛날엔 신체검사를 매년 했어요. 앉은키를 재다가 선생님이 이걸 딱 내려요." 하시며 장난스럽게 옛일을 재연을 하셨다.
얼마나 신나서 장난스럽게 재연을 하셨는지 딱! 소리가 크게 났다. 머리가 얼얼했다. 이 글을 쓰다가 혹시 그때 사진이 있나 하고 인터넷에서 찾다 보니 어떤 분이 댓글을 달았는데 그분도 큰 소리에 놀라셨나 보다.
어느덧 한 시간 정도 촬영이 끝나고 교문 밖에 차들 두고 오셨다고 해서 배웅해 드리려고 나갔다. 안 쓰는 앉은키 재는 기구와 한글 가르칠 때 쓰던 칠판을 교육박물관에 기증하였다.
무거워 들어 드리기 위해 운동장으로 나가니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 흰눈이 가득했다. 여전히 폴폴 내리는 눈은 카메라 앞에서 더 서정적인 풍경을 연출해 감성을 더했다. 눈이 내려서 오시는 길은 불편하셨겠지만 날을 참 잘 고르신 것 같았다.
운동장을 지나 교문까지 선생님과 걸어가는데 눈발이 흩날려 영화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나름 멋졌는데 TV에는 어떻게 나올까 궁금했다. 흰눈 덕분에 멋질 것 같기도 하고 맘에 안 드는 쫄바지 때문에 걱정도 됐다. 섬에 있어도, 아무리 추워도 늘 예쁘게 하고 다녀야겠다고 생각된 살짝 부끄러운 겨울이었다.
출처 그림 사진 네이버, 인간극장 사진 캡처 KBS HUMAN 뭉클 티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