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속 초록, 내 초록의 시작, 내 첫 출사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카메라를 들고 동네나 학교를 오가며 주변만 찍거나, 친구랑 놀러 나갔다가 여름방학을 맞았다.
문득 그냥 이렇게 찍는 게 아니라 커뮤니티의 아저씨들처럼 나도 혼자 장소를 정해서 제대로 출사라는 것을 가봐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저기 찾아보니 서울 세검정과 상명대 근처에 백사실계곡이라는 곳이 있다고 하더라. 사진들이 꽤 조용해 보였다. 그리고 내가 자주 타던 버스가 여기 입구까지 가길래, 나도 한 번 가보자고 다짐했다.
비스타100이나 리얼라200같은 흔한 컬러필름 말고 흑백필름을 써보고 싶어서 BW400CN을 구해서 갔다. 늘 타던 버스를 타고 중간에서 안 내리고 끝까지 가면 되는 곳이라 찾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내가 처음 백사실을 찾았을 때는, 세검정/상명대 부근에서 내렸던 것 같다. 마침 이 날은 비가 오던 날이었다. 우산과 카메라를 대충 움켜쥐고, 지도를 대충 외워서 입구를 찾아가려고 했다.
우산을 광대뼈와 어깨로 붙잡고는 카메라에 빗방울 튀겨가며 찍었다. 지금이야 비 오는 날에는 아예 우비 입고 레인커버를 씌우지만, 그 때는 레인커버란 게 있는 줄도 몰랐다.
그리고 백사실 왼쪽 입구로 올라갔던 것 같다. 스캔 순서를 보니까 맞네.
헷갈려하며 골목들을 돌아 올라가는데, 가는 도중에 비가 그쳤다. 비가 그치고 빛이 보이기 시작하더라. 태어나서 처음 본 순간은 아닌 것 같은데, 사진으로는 빛내림을 처음 담아 보았다. 그냥 와... 하는 생각에 멍하니 셔터를 눌렀던 것 같다. 수평부터 안 맞네.
계곡 하면 으레 그랜드캐년 같은 커-다란 계곡을 생각했는데, 그냥 시냇물이 흐르는 산골 느낌이었다.
계곡은 생각보다 짧았다. 중간에 쉼터 같은 곳이 있고, 양옆으로 5분 거리 오솔길이 나 있다. 그냥 걷기만 한다면 10분 정도면 끝에서 끝까지 갈 수 있더라.
이 필름을 현상하려고 갔더니 컬러 현상해야 하는 필름이라고 하더라;;
몇 장의 사진은 지금도 생각난다. 사진을 잘 찍었느냐를 떠나서, 내가 처음으로 혼자 특정 장소에 가서 사진을 찍겠다고 마음먹고 갔던 곳이라 기억에 남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이 곳을 한동안 찾지 않았다. 정말 기억에 남는 장소고,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갈 수 있음에도 그냥 가지 않았던 것 같다.
돈을 벌어 카메라를 바꿨을 때, 나는 이 곳을 다시 찾았다. 왜 그런진 모르겠는데, 일단 그냥 생각나서 가봐야 할 것 같았다.
이 카메라로 처음 간 곳이 백사실이었다. 6년 만에 왔는데도 펜스가 더 설치되어 있는 것 말고는 그닥 변한 것이 없었다. 여전히 조용했고, 사람은 적었으며, 봄 햇볕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내 인생컷 중 하나를 여기서 건졌다.
그 뒤로, 나는 기회만 되면 이 곳을 찾는다. 새 카메라나 새 렌즈를 샀을 때나, 가끔씩 생각날 때나, 딱히 주말에 어디 갈 곳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높은 확률로 이곳을 찾게 되었다.
봄의 백사실은 그 어떤 곳보다 고요한 것 같다. 마치 숲이란 곳이 이런 곳이구나 하는 느낌이다.
복숭아꽃 벚꽃 온갖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나고, 잎들은 매우 차분하게 돋아난다. 사람들이 많아져도 시끄러운 느낌이 전혀 없고, 나도 좀 앉아서 쉬다 가곤 한다.
나름 산이라 그런 건지, 내가 운이 좋아서 그런 건지 여기 올 때마다 참 하늘이 웅장하다. 평생 볼 빛내림을 여기서 다 보고 온 것 같다.
여름의 백사실은 이 좁은 공간 안에 어떻게 웅장한 숲이 있는지 의심될 정도의 압도적인 느낌을 자랑한다. 4차원 숲인가 보다.
사람들도 조금 더 많이 찾아오지만 거의 대부분 조용한 분위기다.
아쉽게도 가을과 겨울에는 그동안 이 곳을 갈 기회가 없었다. 나는 그동안 주로 봄과 여름에 백사실을 자주 찾았다.
나중에는 가을과 겨울 사진도 찍으러 갈 예정이다.
언젠가 눈이 오는 날엔 반드시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백사실 입구는 세검정초등학교 쪽과 부암동 쪽 입구가 있다. 능금마을 쪽 길은 옛날에 막힌 것 같더라.
세검정초등학교 쪽으로 오면, 봄에는 커다란 벚나무가 맞이한다. 현통사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더 계곡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부암동 쪽으로 내리막길을 여유롭게 걷다가 아래 맛집 몰려 있는 곳에서 냠냠하고 집에 갈 수 있다.
다만, 차를 가져왔다면 주차가 애매하다.
부암동 쪽으로 오면, 계곡 보다는 숲의 느낌을 받을 수 있고, 하늘이 좀 더 가까운 느낌이다. 봄에는 가는 길 내내 개나리 꽃길이 펼쳐지며, 근처 집 마당과 정원에 피어나는 꽃과 나뭇잎들을 보는 것 또한 즐겁다. 세검정초등학교 쪽보다 접근성도 좋다.
하지만 가는 내내 오르막이다.
활기차고 화려한 느낌보다는, 조용하고 차분한 느낌의 백사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나 싶을 정도로 차분한 장소다. 도롱뇽 보호구역이라는 것만 조심한다면, 조용히 와서 지친 멘탈을 회복하고 가기엔 참 좋은 장소일 것 같다.
내게 이 곳은 내 첫 출사지. 내 초록의 발상지 같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