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하고 안정되게

“완벽한 좋은 사람 말고, 적당히 좋은 나로도 충분해”

by 박루민

나는 요즘 “안전하다”는 감각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공포와 불안이 내 삶에 끼어들 때마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은 단순하다. 안전하고 안정적인 삶, 그리고 관계. 화려한 성취도, 거창한 목표도 중요하지만, 그것들이 나를 지탱해주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끝내 내가 돌아오고 싶은 자리는 “나는 안전하다”는 내면의 감각이다.

나는 언제 안전함을 느끼는가? 돌이켜보면, 그것은 외부의 환경이 아니라 내 정체성이 공격받지 않을 때였다. 누군가가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줄 때, 그리고 내가 나 자신을 숨기지 않아도 될 때, 그 순간 나는 편안했다. 반대로 내 정체성이 흔들리거나 부정당할 때, 아무리 좋은 환경에 있어도 마음은 불안했다. 안전이란 결국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종종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친구들도, 연인들도, 오래 알던 이들도 그렇게 말했다.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정말 좋은 사람일까? 나는 나 자신에게도 좋은 사람이었을까? 사실 나는 잘 알고 있다. 어느 누구도 매순간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런데도 좋은 사람이고 싶다는 마음이 지나쳐, 좋은 척을 하게 되면 오히려 더 불안해진다. 진짜 안전은 “좋은 사람”이라는 가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불완전하다는 사실까지 받아들이는 데서 온다.


애착 이론은 내가 “안전하다”는 감각을 어떻게 느끼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아기가 태어나 처음 맺는 관계는 보호자와의 애착이다. 그 관계가 안정적일수록 아이는 세상이 위협적이어도 돌아올 수 있는 ‘안전 기지(base)’가 있다고 믿는다. 반대로 애착이 불안정하면, 세상은 쉽게 위협으로 느껴지고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불안을 경험한다.


애착에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안정형, 불안형, 회피형. 안정형은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해 모두 긍정적인 믿음을 가진다. “나는 소중하다, 타인도 믿을 수 있다.” 불안형은 자기 개념이 약하다. “나는 부족하다, 버려질 수 있다.” 그래서 타인의 반응에 의존하며 정체성을 확인하려 한다. 회피형은 자기 개념은 긍정적이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불신이 크다. “나는 괜찮아, 하지만 타인은 믿을 수 없어.” 독립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다 보니 관계 속에서 고립되고 단절된다.


나 자신을 돌아보면, 나는 세 가지 유형 사이를 오가며 살아온 것 같다. 안정형처럼 보이고 싶었지만, 실제로는 불안형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었다. 누군가의 인정이 내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순간이 많았다. 반대로 회피형의 태도를 취하며, 혼자서 괜찮다고 스스로를 속이기도 했다. 안정감은 이렇게 흔들리며 쉽게 무너졌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안정형으로 가는 길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안전 경험을 반복하며, 뇌 속의 신경망을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안전한 관계와 경험이 쌓일수록, 편도체의 과잉 반응은 줄어들고 전전두엽의 감정 조절 기능이 강화된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감정의 파도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외로움은 단순히 곁에 사람이 없어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다. 내가 내 안에서 나를 찾을 수 없을 때, 그때 진짜 외로움이 찾아온다. 사람들은 종종 주변을 기쁘게 하거나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사이클을 반복한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과 마주할 시간은 두려워한다.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면, 관계 속에 몸을 담그지 않으면, 홀로 있음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나도 그런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있다. 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성장의 시간으로 바꿀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나 자신에게 안전한 존재가 된다.


나는 한때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살았다. 그래서 나의 어두운 면을 철저히 숨기고, 누군가를 울리거나 상처 주는 사람이 아닌 척하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알게 되었다. 누구도 매순간 좋은 사람일 수 없다는 것을. 자기애란 스스로를 완벽한 존재로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완전한 내 모습까지 있는 그대로 알아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나의 진실을 감추지 않고, 결점까지도 드러낼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나는 나 자신에게 안전해진다.


혼자 있는 시간이 더 이상 외로운 시간이 아니라, 홀로 서는 시간으로 바뀔 때 삶은 안정된다. 책을 읽거나, 태권도와 수영을 배우거나, 글을 쓰는 시간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나와의 관계를 단단히 쌓는 과정이었다. 오랜 친구들은 종종 말했다.
“좀 나가서 놀고, 소개팅도 하고 그래야지! 너도 결혼할 사람을 만나려면 밖으로 나가야지.”
하지만 사실 나는 정말 “놀 줄 모르는 사람”이다. 살면서 제대로 놀아본 경험이 없어서, 놀라고 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괜찮다. 나에겐 새로운 것을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 훨씬 재미있다. 배움과 성장 속에서 나는 충분히 즐겁고, 그 과정에서 점점 더 안전한 내가 되어간다.


안전함은 판단하지 않는 태도에서 온다. 내가 아기와 동물을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나를 평가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함께 있는 순간을 살아간다. 나는 그 무심한 안전함 속에서 큰 위안을 느낀다. 안전하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잘 보이거나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상태가 아니라, 조건 없는 수용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럴 수 있지”라는 말을 좋아했다. 영어 표현 중에서도 agree to disagree를 좋아했다. 서로의 차이를 존중할 수 있고, 틀림이 아니라 다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 나아가 판단의 기준이 없이 그냥 “귀엽다”고 느낄 수 있는 관계. 나는 그런 관계를 늘 꿈꿔왔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이유 없이 행복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눈앞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끼고, 자신이나 타인을 판단하지 않고 바라보는 힘도 잃었다. 대신 비교와 경쟁, 평가와 증명 속에서 불안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진짜 안전한 삶은 그 반대에 있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타인 또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관계는 안정되고 삶은 평화로워진다.


결국 안전하고 안정되게 산다는 것은 완벽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완전한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혼자 있어도 괜찮은 힘을 기르며, 건강한 관계 속에서 서로의 정체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나는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기지를 갖게 된다. 공포가 와도, 불안이 스며들어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안전한 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감각이야말로, 내가 앞으로의 삶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토대다.


최근에 받은 TCI 검사에서 나는 이타성과 인내심이 매우 높게 나왔다. 앞으로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삶을 살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내 정체성 또한 소중하게 지킬 것이다. 내가 어떤 정체성을 지키고 싶은지,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더 구체적으로 알아가며 살아가려 한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다 맞추기 위해 내 삶을 꽉 쥐고 사는 대신, 조금은 더 여유롭게. 그것이 내가 꿈꾸는 안전하고 안정적인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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