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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로옥 Oct 12. 2024

얼굴

아이는 너무 늦게 자라고 어른은 너무 빨리 늙는다


유독 더위를 많이 탔던 해다. 재발한 지병을 수술한 치료 과정에 부작용을 겪었기 때문이다. 미지근한 탄산음료를 힘껏 흔든 마개를 것처럼 머리꼭지부터 시작된 땀은 뒷목과 쇄골, 등줄기 아래로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부지런히 움직일수록 줄어드는 일이 아닌 끈기였다. 그러나 끈기가 고갈된단 이유와 병마와 싸운 뒤라는 이유만으로 해야 일들을 버리고 도망치기엔 나는 너무 자라 버렸다.


아프고 고달프단 말은 엄마의 얼굴을 마주하면 맥없이 흩어져버리곤 했다. 가까이 있지만 가장 모를 사람들. 잘못 사귄 친구처럼 서로 때문에 속상하다가도 금세 잊고 히죽거리게 되는 존재.


나는 간혹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본 부모의 얼굴이 늙어있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숨이 차곤 한다. 주름은 늘고 눈꺼풀은 쳐진 채다. 더위에 걷어 올린 바지 속 종아리는 마치 제 치수가 아닌 옷감처럼 가죽만 헐렁하다. 하루에 하루를 보태며 느리게 흘러왔던 세월 동안 그들은 내 친언니를 통해 손주 둘을 본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아이는 너무 늦게 자라고 어른은 너무 빨리 늙는다. 주름 많은 그 얼굴에서 내 얼굴을 발견하기 쉽다. 부모의 지인들은 나를 보며 어쩔 땐 아빠를 어쩔 땐 엄마를 닮았다 하는데, 거울에 비친 요즈음 나의 얼굴은 내가 봐도 어린 날 내 눈에 비쳤던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꽤 오래전 그날, 한 밤 중 우리 자매를 데리고 다급히 택시에 올라탔던 엄마 아빠의 얼굴도 딱 이만큼 젊었었다.


부모가 우리 자매를 데리고 도착한 곳은 커다란 침대 하나와 욕조가 딸린 숙소였다. 빨간 대야에 물을 받아 씻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욕조는 언니와 내가 동시에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컸다. 욕조에 물이 차기도 전에 홀딱 벗고 그 안에 들어간 자매는 장난감 없이도 재미있어했다. 잠수도 하고 발장구도 치고 물 밖으로 눈만 빼놓고 보글보글 숨을 불어넣으며 뜻밖의 횡재를 마음껏 누렸다. 욕실 곳곳에 물이 튀기고 왁왁 소란을 피워도 엄마 아빠는 아무 핀잔도 주지 않았다. 손가락 피부가 쪼글쪼글해진 뒤에야 우리는 물 밖에 나왔다. 샴푸와 비누칠로 향긋해진 살내음을 맡으며 폭신한 침대에 파묻혔다. 작은 몸에 비해 넓은 침대는 날 폭 감싸 안는 커다란 털 짐승 같았다. 딱딱한 바닥에 깔고 잤던 이불보다 훨씬 아늑했다. 소리를 줄여 놓은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불빛과 머리맡에서 도란거리는 엄마 아빠의 목소리에 어린애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신나게 놀고 푹신한 침대에 걸리적거리는 것 없이 누운 순간이 참 달았던 그때에, 나는 그 모든 횡재를 누리기 전 엄마가 엉엉 울던 모습이 떠올라 문득 무서워졌다.  


세상은 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모진 말을 하며 말로써 돌을 던져도 누구 하나 다독여주는 이가 없었다. 어른이라 견뎌야 했던 수모를 못 이겨 기어코 어린 자식 둘을 택시에 태웠다. 도망친 곳은 아늑한 끝이었을까. 가장자리의 가장 끝에서, 그들 서로끼리 많은 말을 쏟아내었다. 우리 자매의 힘으로는 손 쓸 길 없는 커다란 시름이 겨우 서른 언저리의 그들을 서글프게 만들었다.


어른의 난처함을 엿보는 것이 어떤 악몽보다 무서운 나이였다. 세상을 이해하기엔 어렸던 나는 부모의 눈에 깃든 슬픔만은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방방거리고 깔깔거리고, 실컷 물장구를 치는 내내 발가벗은 자매의 귀는 사실 욕실 밖으로 쏠려 있었다. 그날 밤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눈 감은 자매의 머리맡에서 그들은 무얼 궁리했을까. 깊이 들여다보기 무서운 마음은 자매가 뛰어놀던 거기 곳곳마다 물 발자국처럼 남아있다.


꺼내놓을 구구절절함이야 많지만 모든 걸 각설한 뒤의 결론은 어쨌든 그날 나의 부모는 회피 대신 맞닥뜨리는 걸 선택했다는 것이다. 막연한 미래보단 당장에 들이닥친 하루씩을 서툴게 살아내며 자매를 무사히 건사해 냈다. 어른이 무언지 모른 채로 어른이 되어버린 이들로선 최선의 방식이었다 생각한다. 남들에게 늘어놓기엔 빈번하고 번거로운 여러 어리석음은 이미 탈각되어 떨어져 나간 허물일 뿐이다. 그들과 나는 전보단 커지고 단단한 마음으로 오늘을 상대하며 내일을 대비하고 있다.


그날 밤의 그들 나이를 훌쩍 넘어선 지금, 미래에 대한 거창함보단 오늘과 내일 그리고 며칠 후의 무탈함을 빌고 있다. 견뎌내는 것만으로도 용한 날들이었음을 안다. 나는 문득 나보다 앞서 세상에 대한 맷집을 길러야 했을 부모가 안쓰러워지곤 한다. 어린 자매를 붙들고 현실에서 도망치려 했던 밤. 불안하고 수치스러운 하루의 끝에서 결국엔 내일을 다시, 그리고 함께 살아보잔 결단만으로 그들은 그들 나름의 몫을 했다. 종종 어리석은 선택과 실망이 일상으로 찾아왔지만 그것을 빌미로 누구 하나 흩어지지 않고 사라지는 대신 거기 그 자리를 지켜냈단 사실이 다행스럽다. 그래서 땀이 죽죽 흐르고 허리가 쑤시는 요즈음, 나는 나이 든 자식에게 부려지곤 하는 부모의 고집을 아이의 어리광처럼 받아내고는 한다.


까맣고 주름이 생긴 얼굴에서 나와 닮은 구석을 순서 없이 끄집어낸다. 퍼즐처럼 맞춘 그 얼굴엔 어느 밤 도망치고 싶던 젊은 두 사람이 있다. 자매의 머리맡에서 도란거리다 결국 내일을 함께 맞닥뜨리기로 하고 푹신한 털 짐승 같은 침대에서 서로 안은 채 잠이 들었을 그들. 그날 어느 틈엔가 잠들어버려 구경하지 못했던 부모의 곤한 얼굴을 상상해 본다. 그럼 종종 무겁고 무섭게 느껴지는 삶을 다시 견뎌 볼 끈기가 생겨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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