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되는가』를 읽고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요즘에는 책에서 얻은 지식을 삶에 적용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서평을 작성할 때도 책의 내용에 초점을 두고 내게 적용한 결과와 느낌 위주로 남긴다. 『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되는가』(마크 월린 지음·정지인 옮김, 심심)도 그렇게 읽다 보니 완독하는 데 2주나 걸렸다. 약 340쪽 분량밖에 안 되지만 다른 책보다 오래 걸린 건 그만큼 내용이 무거웠다는 거겠지?
나는 평소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수치스럽고 두렵고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은 분명히 있지만 그런 건 단지 안 좋은 기억이라고만 생각했다. 트라우마의 정의를 찾아보니 우리말로는 '외상'인데 평소에 사용할 때는 신체보다는 정신적인 외상을 뜻하는 편이다. 이러한 상처가 심하면 정신적 장애까지 유발할 수 있어 가볍게 여길 문제는 아니다. 이렇게 보니 우리는 누구나 트라우마 하나쯤은 가지고 살아갈 거로 생각하는데 이 책에서는 놀랍게도 내가 경험한 트라우마가 실제로 내가 아닌 가족으로부터 유전된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즉, 내가 만든 감정이 아니니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정신의학과 신경과학 교수 레이철 예후다의 연구에 따르면 부모 중 한쪽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을 경우 자녀가 그 증상을 경험할 가능성이 세 배 높으며 우울증이나 불안증으로 고통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부모에게서 들은 것이 아니라 유전을 통해 전달된다고 믿는다.
일반적으로 알코올의존증이 심한 아버지가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면, 자손 중 누군가는 그 모습을 이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하지만, 환경적으로 그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 유전적으로 이어질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실제로 인간의 유전자와 99% 일치하는 쥐를 연구한 결과 트라우마가 유전되는 핵심적인 경로까지 발견했다고 한다.
생쥐의 혈액과 뇌, 난자, 정자에 발생한 화학적 변화는 이후 세대에 나타나는 불안증이나 우울증 같은 행동 패턴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새끼 쥐를 어미와 떨어뜨려 놓았더니 그 트라우마가 새끼 쥐의 유전자 발현에 변화를 일으켰고, 그것은 이후 3대에까지 이어졌다.
p.68
그렇다면 내가 만든 감정이 아닌데도 트라우마를 계속 가지고 살아야 하는 걸까? 다행히 오랫동안 지녔던 이 감정을 덮을 만큼 강한 이미지나 경험을 통해 뇌를 자극하면, 유전자는 바꾸지 못해도 유전자가 기능하는 방식은 바꿀 수 있다고 한다. 새로운 경험으로 긍정적인 기분을 느끼는 빈도가 증가하면 뇌 구조도 개선되는 것이다. 이는 치유의 시작이다. 좀 더 구체적인 트라우마 치유 방법을 알아보자.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단어나 문장 등의 언어 표현을 핵심 언어라고 하는데, 이는 신체 감각, 감정, 행동 등의 비언어적 표현으로도 나타난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을 표현할 때 가장 강렬하게 표현하는 단어가 나의 핵심 언어가 된다. 이 정보가 모여 내 무의식의 지도, 즉 핵심 언어 지도가 형성되어 트라우마의 근원을 파악하는 길잡이가 된다.
그런데 핵심 언어를 찾아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생명도 부모에서 자녀로 흐르는데, 저자 마크 월린은 부모와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다음 네 가지 중 한 가지만 해당해도 성장이나 성취 등에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 문제부터 고려하고 파악한다면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근원을 밝히는 것이 더 수월할 것이다. 마크 월린도 시력을 잃으며 휩싸인 공포와 불안을 떨치기 위한 치유의 과정에서 부모와의 관계를 바로잡았다.
1. 한쪽 부모와만 결합되어 있다.
2. 한쪽 부모를 거부했다.
3. 아주 어려서 어머니와의 유대가 단절되는 경험을 했다.
4. 가족 체계 안에서 부모 이외의 다른 구성원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p.109
트라우마 치유를 위한 핵심 언어 지도는 핵심 불평, 핵심 묘사어, 핵심 문장, 핵심 트라우마라는 네 가지 도구를 이용하여 작성한다.
*핵심 불평: 가장 깊은 걱정, 고투(苦鬪), 불평을 묘사하는 핵심 언어
*핵심 묘사어: 부모를 묘사하는 핵심 언어
*핵심 문장: 가장 큰 두려움을 묘사하는 핵심 언어
*핵심 트라우마: 핵심 언어의 배후에 있는 가족사의 사건 또는 사건들
p.230
이 과정에서 저자는 예를 들어,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결국 내가 어떻게 달라지기를 원하는지 등 약 10가지의 질문을 던지며 위의 네 가지를 모두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 펜과 노트를 준비해 이 모든 과정을 써 보면서 내가 가진 트라우마의 근원을 밝히도록 하고 있다. 이 방법을 따라 하니 책을 읽는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트라우마를 치유하기를 원한다면 적극적으로 이 질문에 답을 하며 내면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봤으면 한다.
이 활동은 부모님 혹은 연관된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태어나기 전 가족의 이야기를 묻고 들으며 반복되는 언어나 나이, 사건, 감정, 증상 등에 집중하면 중요한 단서가 발견될 수 있다. 저자는 부정적인 감정이 깊을수록, 내면 깊숙이 있던 감정이 표면으로 떠오를수록 치유하라는 신호이며 치유가 수월하다고 말한다. 또한 핵심 문장을 쓰는 것만으로도 마음 깊은 곳에 있던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표면으로 꺼내 분리한 것이므로 치유의 절반은 성공한 것이 아닐까 한다.
두려움 그 자체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트라우마 사건에서 유래한 것이거나 부모 중 한 사람이 겪은 고통의 결과물일 가능성이 크다. 정확히 어떤 일인지는 모르더라도 트라우마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다.
p.203
핵심 언어 지도를 만들어 내 감정을 마주하고 트라우마의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다면 그 감정에서 해방되는 일만 남았다. 저자는 문장과 이미지 두 가지의 방법을 추천한다. 새로운 감정을 나타내고 화해나 결심을 보여주는 치유의 문장을 말하는 것과 앞서 말했듯 기존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제압할 수 있는 새로운 경험과 이미지를 의식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어머니와의 관계 회복이다. 어머니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처음으로 관계를 맺는 사람이므로 그 유대 관계는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살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로 특히 힘들다면, 어머니와의 애착이나 유대 관계를 살피는 것이 문제 해결의 단서가 될 수도 있다.
초기에 어머니와의 유대에 문제가 생기면 두려움과 결핍, 불신이라는 검은 구름이 우리를 휘감는다. 입양처럼 영구적인 것이든, 일시적이지만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것이든, 어머니와 자식 사이에 벌어진 틈은 인생에서 겪는 여러 괴로움의 온상이 되기도 혼다. 지속적인 유대의 단절은 생명줄을 잃은 것과 같다. 이때 우리는 조각조각 부서진 상태에 놓이는데 그 조각을 다시 이어 붙이려면 어머니가 필요하다.
p.257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내 꿈은 교사였다. 꿈은 중간에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고 그 목표 하나로 대학생 때 휴학도 못 해봤다. 그만큼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친 꿈이자 목표였다.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스물네 살, 1년에 한 번 보는 임용고시를 보기 4일 전이었다.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착하고 건강한 사촌 동생이 학교 수업 시간에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나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계기였다. 자식을 잃고 남은 부모의 슬픔은 부모를 잃은 자식의 슬픔에 견줄 수 없을 만큼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러한 부모와 싸우고 있는 교사라는 사람을 보며 내가 이런 교사가 되고 싶어서 이렇게 공부한 건가 싶은 좌절감과 수치심이 밀려와 장례를 마친 다음 날이었던 시험을 제대로 치를 수 없었다. 지금까지 키워주고 지원해주신 부모님께 가장 큰 불효를 저질렀다. 지금 생각하면 멘탈이 약해서 저런 결정을 했구나 싶지만, 목표를 잃은 내가 많이 휘청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안타깝게도 이 가정은 행복하지 못했다. 나는 그동안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만 초점을 맞췄다. 그런데 형제도 남은 사람이었다. 죽은 아이의 동생은 그 어린 나이에 부모보다 더 잘 따르던 형을 잃은 것이다. 이 아이는 이후 학교생활 내내 문제를 일으켰고 집안의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나는 이 아이를 데리고 이야기도 해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그저 똑같은 말을 하는 어른 중 한 명으로 느꼈을 것 같다. 내가 뭘 알았겠나. 그저 이 아이보다 조금 더 살아봤다는 이유로 바른말만 뱉었겠지.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책을 읽으며 이 아이가 힘들었던 문제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는 당시 엄마가 아닌 할머니와 애착이 강한 상태였다. 의지했던 할머니도 형이 떠난 지 얼마되지 않아 병이 깊어져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그럼 이 아이는 의지하던 사람을 두 명이나 잃은 것이고 유대가 약한 엄마와 잘 살아가는 것이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이미 마음의 문이 꽁꽁 닫혀 있어 섣불리 두드리기도 어렵고,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힌트를 얻은 것 같다.
감사하게도 나는 첫째라 동생들보다 어린 시절 초기 부모님과의 애착 관계가 잘 형성되었다. 분명 좋지 않은 기억도 있지만, 더 커다란 좋은 감정이 많아 그에 연연하지 않고 감사하며 잘 클 수 있었다.
『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되는가』는 내가 두려워하는 무언가를 객관적으로 분리해내고 그 감정에서 해방할 수 있도록 돕는 책이다. 그 감정으로 힘들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 책을 읽으며 힘들었다. 왜냐하면 잊고 있던 일부 나쁜 기억이 많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영향 말고도, 부모님보다 나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낸 동생들에게 끼친 나쁜 영향까지 생각나 미안한 마음이 컸다. 다행인 건 감정적인 여파가 크지 않았다는 것. 슬퍼서 눈물을 흘리며 되뇐 건 맞지만, 그러한 기억이 스스로 문제 삼는 내 행동의 원인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의심을 할 수 있었다. 의심이 가능하다면 이제 풀어내기만 하면 된다. 지금 잘 풀어내야 미래의 자손에게도 두려움을 물려주지 않을 것 같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언제나 그렇듯 시작이 반이다.
당신이 들어가길 두려워하는 그 동굴은 알고 보면 당신이 찾아 헤매던 근원이다.
- 조지프 캠밸, <신화와 인생>
p.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