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안 멈춘다!!!! 어? 어? 어???????
쾅——— 헉....
꿈인가 싶었다. 출근을 위해 운전을 시작한 지 한 달쯤 되었을까, 신호대기 중이던 차에 그대로 돌진했다. “어떡해.. 어떡해...”라는 말만 되뇌며 당황하고 놀랐던 그때, 브레이크를 아무리 세게 밟아도 멈추지 않던 기억이 생생하다. 두 대의 차는 눈으로만 봐도 사고 난 차였다. 앞차의 운전자는 아침부터 이게 뭐냐고 화를 냈고, 잘못한 나는 죄송하다고 연신 사과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다고 해서 수습 후 다시 차를 몰았다. 도저히 회사까지 운전할 자신이 없어서 엄마 회사에 주차했다. 엄마를 직장에 모셔다드리느라 매일 출근길을 엄마와 함께했다. 그날은 또 동생까지 태우고 가는 길이었다. 그제야 충격에서 조금 벗어나 정신이 돌아왔다.
“엄마는 괜찮은 거야?”
차 없이는 다니기 힘들었던 이 회사를 퇴사한 후 단 한 번도 운전대를 잡지 않았다. 가족을 다치게 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운전은 극도로 기피하는 공포의 대상이 된 것이다. 『몸은 기억한다: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 (베셀 반 데어 콜크 지음·제효영 옮김·김현수 감수, 을유문화사)에서는 이렇게 트라우마로 남은 사건 자체는 치료할 수 없지만, 불안이나 우울 등 몸과 마음에 남은 흔적은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반 데어 콜크 박사가 30여 년간 트라우마를 연구한 결과와 임상에서 시도한 사례를 담아 현대 정신의학계의 생각이 담긴 고전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다양한 측면에서 트라우마를 이해하게 만드는 개론서의 느낌이다.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들의 뇌를 연구하여 트라우마로 인해 정신과 신체가 어떻게 변하는지, 나아가 발달 과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그 후 현재를 잘 살아가도록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방법을 소개하는데, 현실적으로 가장 도움이 될 것 같아 이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트라우마가 없다고 하더라도 스트레스를 해소할 때도 도움이 될 것이다.
트라우마로 인해 과민한 반응을 원래대로 회복하려면 이성적인 뇌와 정서적인 뇌의 균형을 되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정서적인 뇌에 접근해서 변연계 치료를 해야 하는데, 신경학자인 조지프 르두와 연구진은 그 유일한 방법이 자각을 통해서,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인지하고 감정을 느끼게 하는 뇌 영역인 내측 전전두엽 피질의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변연계 치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뇌 구조의 이해가 필요하므로 요약한다.
이성적인 뇌 뇌에서 가장 젊은 축에 속하며, 외부 세계와 일을 처리함(방법 모색, 시간 관리, 행동 순서), 복잡한 항목을 자세히 분석
파충류 뇌 태어날 때 이미 활성화된 가장 원시적인 부분
변연계 파충류의 뇌 바로 위에 위치한 포유류의 뇌, 감정의 중추, 위험 감지, 생존에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결정하는 주체이자 삶의 문제에 대처하는 중심 본부
정서적인 뇌 파충류의 뇌 + 변연계, 중추신경계 중심에서 행복을 돌보는 역할, 감각적 유사성으로 서둘러 결론을 내림
전두엽 언어 사용, 추상적 사고, 계획 수립, 반성적 사고, 미래 예측을 가능하게 함. 트라우마를 이해하는 핵심이자 공감 능력의 중추
감정의 강도 화재경보기의 역할을 하는 편도체와 감시탑의 역할을 하는 내측 전전두엽 피질에 의해 결정됨
경험의 정황과 의미 뇌의 기록기 역할을 하는 배외측 전전두엽 피질과 해마가 포함된 시스템이 결정
내면을 마주하고 인지하고 돌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미주신경(심장, 인두, 성대, 내장기관 등에 넓게 분포해 부교감 신경 및 감각신경 역할을 수행하는 신경)의 감각섬유(뇌와 다양한 장기를 이어 주는 신경) 중 약 80퍼센트는 구심신경(감각 수용기로부터 중추신경계로 신호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신경)이다. 즉, 정보가 신체에서 뇌를 향해 전달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호흡하고 노래하고 움직이는 활동을 통해 각성 체계를 직접 훈련시킬 수 있다.
p.326
평소에 긴장을 많이 할 때 심호흡을 하라는 이야기도 같은 맥락인 것 같다. 나도 신체 균형이 깨져서 불면증이 왔을 때 명상과 복식호흡을 꾸준히 해서 신경계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대부분 트라우마가 일으키는 감각과 스트레스에 끌려다닐 것이다.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각'이 필요하다. 마음을 열고 내 생각에 따라 감각이 어떻게 변하는지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마음 챙김은 정신의학, 심신의학 분야의 수많은 문제와 스트레스 관련 증상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훌륭한 지원군들로 구성된 네트워크가 트라우마를 겪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기능이 가장 강력한 단일 요소라는 것은 연구가 거듭될수록 재차 입증된 사실이다.
p.331
평소에도 친숙한 사람과 환경에서 편안함을 느끼는데, 트라우마가 있다면 그러한 환경은 더욱 필요할 것이다. 잘 아는 사람들과 안전하다고 느끼는 공간에서의 관계 형성은 필수이다. 나아가 내 아픔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 나 역시 단순히 심리학책이 좋아 도전한 독서 모임에서 현재 서로 마음을 나누며 상담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주변에 그러한 사람이 없다면 상담 기관이나 병원을 찾는 것도 방법이다.
총알이 발사되는 소리와 최루탄 냄새가 나는 피폐한 환경에서 무기력한 모습으로 살던 사람들이 한 여성이 시작한 노래와 춤에 어느덧 집단 전체가 동참했다. 그 후 생기를 찾고 현실로 돌아온 사람들의 모습에 놀랐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또한 말을 하지 못했던 소녀가 고무공풀, 평균대, 터널 등 감각 클리닉에서 다양한 활동을 한 지 6주쯤 후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서 앞서 살핀 것처럼 관계와 감각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다.
스트레스가 쌓였을 때 즐겨 찾는 곳이 야구장이다. 내가 쾌감을 느끼는 부분은 가벼운 율동과 큰소리로 외치는 단체 응원인데 이 역시 유사한 맥락인 듯하다. 그저 좋아하는 행동을 해서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생각했는데 이유가 명확할 줄이야.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진정시키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다른 사람과 접촉하고, 포옹하고 가볍게 달래 주는 손길을 느끼는 것이다. 이 과정은 과도한 각성 상태를 누그러뜨리는 데 도움이 되며, 자신이 온전하고 안전하고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어떤 책임을 지고 있다는 느낌을 일깨운다.
p.340
감정이 격해졌을 때 백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포옹이나 손을 잡아주는 행위로 마음이 안정된 경험이 있다. 상대방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기도 했고, 나를 그만큼이나 생각한다는 유대감을 느껴서 신뢰가 높아지기도 했다. 책에서는 지압과 마사지도 추천하는데 이 경험은 처음이 중요하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 내 몸을 만지는 걸 싫어하는 편인데 마사지를 처음 받았던 경험이 불쾌하게 남았다. 이는 신뢰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혹은 유대감이 형성된 후에 시도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학대당한 아이들, 가정 폭력의 덫에 갇힌 여성들, 감금당한 사람들 대부분이 경험하듯 감당할 수 없는 힘에 강제로 굴복해야 하는 사람들은 체념하고 순응하면서 생존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뿌리 깊게 자리한 습관적 굴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상황에 참여하고 방어하는 신체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p.344
고난이 닥쳤을 때 우리 몸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한다. 그 상황을 견디도록 하기 위해서이지만, 무기력한 상태에서는 이 호르몬이 나를 방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공격해서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한다. 이럴 때의 치료는 트라우마의 사건을 파헤치기보다 당시의 감각과 감정이 신체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파악한다.
실제로 운영하는 '노상강도 대응 모델링 프로그램'이 있다. 이는 1971년 가라데 유단자 여성이 성폭행을 당한 사건을 계기로 '행동 개시 시점(공격 개시 순간)'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그 자리에서 얼어붙는 반응에서 벗어나고 공포를 긍정적인 반격의 에너지로 전환하는 법을 가르친다.
지난주 『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되는가』에 이어 트라우마 책을 연달아 읽으니 과장 좀 보태서 죽을 맛이다. 읽다 말고 다른 책으로 갈아타길 여러 번, 정신을 차리고 슬금슬금 돌아온다.
3주 동안 이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공통으로 느낀 점이 있다. 첫째, 나는 트라우마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소하고 평범한 정신적인 충격이나 상처도 트라우마라는 자각. 둘째, 잊었던 기억과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건을 마주하며 받는 감정 소모와 스트레스. 왜 잘 지내고 있는 나를 괴롭히는가? 셋째, 사건에 반응하는 감정의 크기를 비교하며 회복 정도를 저울질하는 내 모습. 넷째, 내가 느낀 이 세 가지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구나! 라는 깨달음.
실제로 몸과 마음이 아팠던 재작년부터 작년까지 어떻게든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 내 감정이든 여행 기록이든 맛집 후기든 꾸준히 썼다. 글을 쓰면 소위 멍때리던 일상에서 강제로 생각을 해야 했고, 그렇게 쌓아둔 이야기를 뱉어내면 속이 후련했다. 하고 싶은 말의 1/10만 말로 하고 나머지는 글로 토해내는 성향이라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글이 길면 펜을 잡고 쓰기 지루해서 주로 온라인을 활용했는데, 이는 대나무숲을 찾던 내게 제격이었다. 결과가 어떻든 이 과정을 통해 감정을 많이 배출하고 마음을 보살핀 건 사실이다. 그래서 나도 『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되는가』에서 강조하는 글로 쓰며 치유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있다.
여러 사람이 글을 쓰면서 마음을 치유하는 효과를 봤다고 하는데 쓰는 것 말고 다른 방법으로 치유할 수는 없을지 궁금했다. 그 궁금증을 이 책에서 풀었다.
작년에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개봉을 기다렸다. 원작과 비교해 보고 싶었던 목적은 잊고 영화에 공감하며 많이 울었다. 영화관에는 어머니 세대의 관객이 참 많았는데 옛날을 회상하며 한마디씩 하시는 모습에 우리 엄마를 생각하니 어딘가 아린 듯 슬펐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울림은 지금 우리 곁에는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적절하게 표현했다는 생각이다. 다른 글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트라우마는 전쟁 같은 특정한 사건에 의한 상처만이 아니다. 우리가 평소 겪는 수많은 정신적인 상처도 트라우마로 남는다. 내 마음 상태를 파악했는데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 없다면 상담으로 마음과 마주하는 방법도 추천하고 싶다. 트라우마에 갇혀 보내기에는 남은 삶이 길다. <82년생 김지영>은 결혼 후 경력이 단절되어 육아하는 특정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마음이 아픈 줄도 모르고 아픔을 담아둔 채 그저 오늘을 사는 당신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환자들이 현재를 온전하게,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감당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겪으면서 망가진 뇌 구조가 원상태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 감각을 없애면 반응성을 줄일 수 있겠지만, 가만히 길을 걷거나 요리를 하고 아이들과 같이 노는 것과 같은 평범한 일상에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삶은 그냥 스쳐 지나가 버린다.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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