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컨설턴트의 하루, 프레임워크를 내려놓고 고객을 처음으로 본 이야기
세션 전날 밤이었습니다. 저는 다음 날의 타임라인을 정리하면서 꽤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꼈습니다. ABC 피드백, 중장기 전략맵, JTBD 기반 고객 설정, 책임 조직도, 경영 계획 캔버스. 하루 안에 여섯 가지 산출물의 초안을 완성하는 고밀도의 계획이었습니다. 오전에는 이것을, 오후에는 저것을. 시간대별로 흐름을 쪼개고, 순서를 맞추고, 예상 소요 시간을 촘촘하게 채웠습니다.
기획만 놓고 보면 구조는 정교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완성도라고 불렀습니다.
다음 날 현장은 그 완성도가 하나의 전제 위에 세워져 있었다는 것을 알려줬습니다. 그리고 그 전제가 틀렸다는 것도.
고객사에 도착했을 때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웹디자이너가 갑작스럽게 채용됐는데 다음 주가 출근이었습니다. CS 직군 면접이 그날 오후에 잡혀 있었습니다. 대표님의 표정에는 이미 오늘 해야 할 일들이 가득한 사람의 긴장감이 있었습니다.
저는 잠시 멈췄습니다. 계획대로 밀고 나갈 것인가, 아니면 지금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볼 것인가. 그리 오래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계획을 접었습니다.
그날 오후, 예상치 못한 것들이 만들어졌습니다. 면접 질문지, 신입 직원의 첫날 온보딩 시간표, 직무별 지식 리스트, 1on1 양식. 제가 들고 간 여섯 가지 산출물 중 두 가지는 끝내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세션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저는 그 하루를 오래 곱씹었습니다. 실패인가, 아닌가. 계획을 못 지켰으니 실패인가. 고객에게 필요한 것을 만들었으니 성공인가. 그 경계가 처음에는 선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만약 그날 계획대로 밀고 나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경영 계획 캔버스는 채워졌을 것입니다. 정교한 산출물이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주 첫 출근한 직원은 아무런 준비 없이 하루를 시작했을 것입니다. 오후의 면접은 즉흥적으로 진행됐을 것입니다. 그 주에 가장 시급했던 문제들은 세션이 끝난 뒤에도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제야 보였습니다. 제가 들고 간 계획이 틀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세운 전제가 틀렸습니다.
이 고객사는 7개의 신규 브랜드를 동시에 런칭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비전은 컸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비전의 크기에만 맞춰 개입의 수준을 설계했습니다. 큰 비전 앞에는 정교한 전략 프레임워크가 필요하다고. 그래서 경영 계획 캔버스를 완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첫 걸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조직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과거 데이터가 없고 역할 구조도 채 정렬되지 않은 혼란기에 있는 조직에게, 5년을 역설계하는 캔버스는 한 단계 앞선 개입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당장 필요했던 것은 내일 출근하는 직원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이 사람에게 첫 달에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오늘 오후 면접에서 무엇을 물어볼 것인가였습니다. 비전을 실행할 운영 인프라가 먼저였습니다.
저는 고객의 현재가 아니라 고객의 비전을 보고 개입 수준을 결정했습니다. 그것이 진짜 실수였습니다.
돌아와서 이 회고를 쓰면서 저의 사각지대 두 가지를 적었습니다.
첫 번째는 플래닝의 해상도 문제였습니다. 각 산출물에 걸리는 시간을 이상적인 상황을 기준으로 잡았습니다. 변수가 없을 때, 고객이 충분히 준비됐을 때,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날은 없습니다. 촘촘하게 짠 계획은 단 하나의 변수에도 전체가 흔들립니다. 버퍼가 없는 계획은 계획이 아니라 희망에 가깝습니다.
두 번째가 더 본질적이었습니다. 프레임워크가 먼저였고, 고객의 성장 단계 진단이 나중이었습니다.
컨설팅에는 좋은 도구들이 있습니다. 잘 설계된 캔버스, 검증된 프레임워크, 정교한 양식들. 저는 그것들을 공부했고, 익혔고, 준비해 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도구를 적용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됐습니다. 경영 계획 캔버스를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금 이 고객에게 무엇이 먼저 필요한가라는 질문보다 앞섰습니다.
빈칸을 들고 가서 채우라고 하면, 고객은 컨설턴트의 수업을 받는 학생이 됩니다. 그 자리에서 나오는 답은 고객의 진짜 생각이 아닐 수 있습니다. 빈칸을 채워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나온 답입니다. 컨설턴트가 먼저 고객의 상황을 진단하고 가설을 담은 초안을 만들어 갔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고객과 함께 그것을 고쳐나갔어야 했습니다. 창조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과 수정을 요청하는 방식으로.
역설적인 것이 있었습니다. 계획이 무너진 자리에서, 계획에 없던 것들이 생겼습니다.
그날 만들어진 온보딩 시간표와 면접 질문지는 그 자리에서 바로 쓰일 것들이었습니다. 제가 원래 계획했던 산출물들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고객의 내일에 닿는 것들이었습니다. 그것이 이번 세션이 드러낸 진짜 메시지였습니다. 고객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나 가장 정교한 프레임워크가 아니라, 지금 그 조직이 실제로 소화할 수 있는 다음 한 걸음이라는 것.
계획의 붕괴는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고객의 진짜 병목이 어디에 있는지를 드러낸 단서였습니다.
이번 경험을 통해 한 가지가 분명해졌습니다. 컨설턴트의 역할은 가장 정교한 프레임워크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이 고객이 실제로 소화할 수 있는 다음 한 걸음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세 가지를 바꾸기로 했습니다.
모든 세션의 타임라인에는 예상 시간의 1.5배를 기본으로 설정합니다. 여유는 낭비가 아닙니다. 현장을 흡수하는 공간입니다. 항상 플랜 B를 준비합니다. 주요 과제가 무산됐을 때 바로 전환할 수 있는 운영 인프라형 예비 세션을 상시 대기시킵니다. 준비 없는 유연성은 즉흥이 됩니다. 그리고 빈칸 대신 초안을 들고 갑니다. 고객에게 채우라고 요청하기 전에 컨설턴트가 먼저 가설을 세웁니다. 틀려도 됩니다. 초안은 수정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완벽해 보이던 계획이 조용히 무너지던 오전. 그 무너진 자리에서 예상치 못한 것들이 만들어지던 오후.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 나는 오늘 고객의 현재를 봤는가, 아니면 내 계획을 봤는가.
현장은 계획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래서 현장이 가장 좋은 교과서입니다.
더 많은 프레임워크를 가져가는 방향이 아니라, 더 정확한 진단을 통해 더 적합한 순서로 개입하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이번 회고는 그것을 몸으로 배운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