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앞에서 내가 고른 피부의 기준

clear vs. clean

by 루인

어릴 적부터 나는 화장을 즐겨하지 않는 편이었다. 체육 시간 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려 교실 뒤에 걸린 거울을 바라보는 일조차 괜히 수줍었던 10대 시절을 지나, 대학 졸업사진을 찍을 때에도 “무거워서 눈을 뜰 수가 없어요. 그냥 떼어 주세요”라며 속눈썹을 붙이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에는 대세에 떠밀리듯 백화점 1층 화장품 매장을 기웃거리며 값비싼 제품들을 사기도 했지만,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유통기한을 넘겨 버린 것들이 더 많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맨얼굴로 다닌 것은 아니다. 선크림만큼은 꼼꼼히 바르고, 남들이 보았을 때 ‘관리 안 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의 관리는 늘 유지해 왔다. 과한 화장을 하지 않는 대신, 깔끔함만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화장품을 발라도 결국 모든 것을 이기는 건 시간이다. 해가 바뀔수록 거울 속 얼굴이 점점 낯설어졌다. 학생들이 내 나이를 제법 정확히 가늠하기 시작했고, 아침에 남은 베개 자국은 예전보다 오래 머물렀다. 토너와 에센스, 크림을 차례로 발라도 수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연의 순리라 받아들이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최대한 늦추고 싶은 마음에 오랜만에 단골 피부과를 찾았다.


잊을 만하면 올라오는 뾰루지에 염증 주사를 맞고, 간단한 관리만 받고 나오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문득 지금 내 피부 상태를 객관적으로 알고 싶어 즉흥적으로 상담을 신청했다. 마스크 너머로 앳되어 보이는 상담 실장은 비포·애프터 사진을 내밀며 여러 시술 이름을 빠르게 나열했다. 내가 궁금했던 건 ‘뭘 하면 좋아진다’가 아니라, 지금 나는 어떤 상태인가였는데 말이다.


1년 간격으로 찍은 내 사진을 보자 시간의 흔적은 분명했다. 특수 카메라로 촬영한 피부는 조명 아래에서 애써 외면하던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실장은 가벼운 시술 몇 가지로 관리를 시작하자고 권했지만, 나는 그냥 병원을 나왔다. 한 번 시작하면 멈추기 어려울 것 같았고, 무엇보다 올해는 조금 더 단단하게 지출을 관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와 피부과 전문의의 유튜브 영상 몇 개를 찾아봤다. 그리고 당분간은 좀 더 부지런해지기로 결심했다. 크림을 아끼지 않고 덧바르고, 단백질과 비타민 C를 좀 더 챙겨 먹고, 잠자는 자세에도 조금 더 신경 쓰는 것. 이런 노력들이 단기간에 눈에 띄는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시술의 도움을 받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고 싶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clear skinclean skin은 꽤 다른 개념이다. clear skin은 잡티 하나 없이 맑아 보이는 상태다. 결과에 가깝고, 때로는 유전이나 타이밍, 운의 영역이 되기도 한다. 반면 clean skin은 염증이 잘 관리되고, 기본적인 균형이 유지되는 상태다. 눈에 띄게 빛나지는 않더라도, 무너지지 않게 돌보는 과정에 가깝다.


피부뿐만 아니라 삶도 그렇다. 모든 게 정리된 듯 반짝이는 clear 한 인생이 있는가 하면, 화려하진 않아도 매일 조금씩 닦아내며 유지하는 clean 한 하루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단번에 정리된 선택, 군더더기 없는 결과, 매끈해 보이는 삶을 부러워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깨닫는다. 인생은 한 번의 시술로 해결되지 않고, 대부분은 귀찮고 반복적인 관리의 누적이라는 것을.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오늘의 나를 무너뜨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피부도, 생활도, 선택도. clear 하지 않아도 괜찮다. 대신 clean 하게, 오늘을 넘기고 싶다.


I may not have clear skin, but I’m learning how to keep my life cl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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