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 게 아니라 버텨낸 거였다

남아준다는 이유로, 나는 나를 놓고 있었다

by luna Han 윤영

윤영아, 가자.

그 말을 듣기 전까지
나는 이미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약속은 지켰지만,
만나지 못할 이유를 마음속에 쌓아두고,
다음 지하철이 오면 그대로 타고 가려고 했다.

한 달 동안 우리는 매일 통화를 했지만,
나는 끝내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 이름이 불리는 순간,

나는 그 결심을
아무렇지 않게 내려놓았다.

그래, 하루쯤은 괜찮겠지.

나는 그렇게
나를 설득했다.


그날 우리는
다음 약속도 없이 헤어졌지만,

그는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내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회사 로비에 서 있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늘 같은 자리,
늘 같은 시간.

6시.

나는 그 반복을
나를 향해 멈추지 않고 오는 마음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 하나로
나는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의 반복보다 더 이상했던 건,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하나의 기준을 만들었다.

마음이 커지는 순간,
끝내자.

그 선을 넘지 않으면
괜찮다고,
나는 나를 설득했다.

그건 또 다른 합리화였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만들어낸 기준처럼 움직여주지 않는다.

나는 이미
그 선을 넘고 있었다.

그래서 먼저 말했다.

그만하자고.


그날 그는 울었다.

그녀와 정리했다고, 커플링도 빼고 왔다고.

나는 그의 말을 믿은 게 아니라,
믿어야 하는 쪽을 선택했다.

안 된다는 마음과
괜찮다는 마음이 엇갈리는 사이,
그의 눈물이
결국 나를 움직였다.

그리고 몇 달 뒤,

그는 여전히 그녀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나는 다시 떠나려 했다.

이번에는 정말로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는
또 다른 약속을 꺼냈다.

내가 다시 자신을 믿어주지 않으면
원서 마감날,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그날도 그는
로비에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그 말, 그 책임을 나에게 넘기는 약속 앞에서,

나는 또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떠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이미 답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아니,
알고 있었던 게 아니라
모른 척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의 인생을 건 약속 앞에서,

나는
또, 내 결심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있어야 하는 나를 선택하고 있었다.

결핍이 있는 사람은
가슴에 커다란 구멍 하나를 안고 산다.

그와의 시간은
그 구멍을 잠시 덮어주었고,

나는 그게 채워진 거라고 착각했다.

그래서
누가 거기 있어준다는 이유 하나로
나는 다 받아들이고, 다 버티는 쪽을 택했다.

너, 사랑한 거 아니야.
버텨낸 거야.

나는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돌아오는 그를 받아들였다.

그의 반복보다 더 이상했던 건,

그걸 알면서도 버틴 나였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비어 있던 자리가 잠시 채워졌다는 안도감이었다.

그래서 나는
떠나는 대신
남아 있는 쪽을 선택했다.

그 선택은 결국, 내가 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보았다.

내 옆에서, 너무 아무렇지 않게 그녀와 통화하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몰랐지만,
지금의 나는 안다.

결국 나는 그를 놓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나를 놓고 있었던 것이다.


✉️

그 날의 나에게.

너, 그거 사랑이라고 믿고 있었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남아줄 거라는 가능성을.

그래서 확신 대신
가능성을 붙잡고 있었고,
바뀔지도 모른다는 쪽을 계속 선택했던 거야.

너 약했던 거 아니야.
그냥 너무 오래 혼자였던 거야.

비어 있는 자리를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 몰랐던 거지.

그래서
누가 거기 있어준다는 이유 하나로
다 받아들이고, 다 버티는 쪽을 택했던 거야.

괜찮아.

그때의 너는
사람이 진실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몰랐을 뿐이니까.

이제는 알잖아.

그래서 앞으로는
너를 잃는 선택은 하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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