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지금은 루나로 잘 살아내고 있어.
아침,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을 들고 나오는 길.
두 손에 머금은 온기보다, 유난히 파란 하늘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괜히 반가웠다.
그 순간, 오래된 장면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어렸을 때, 동네에는 친구들이 있었다.
“윤영아, 노올자!”
누군가 대문 앞에서 부르면, 나는 망설임도 없이 달려나갔다.
술래잡기, 다방구, 땅따먹기.
해가 질 때까지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뛰놀았다.
온몸이 땀과 먼지, 흙으로 범벅이 될 무렵이면
어김없이 동네 어귀에서 들려오던 소리.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
그 시절이 문득 그리웠다.
해맑게 동네를 뛰어다니던 어린 나.
그 아이가 유난히 보고 싶어졌다.
그 시절의 나는, 상상이나 했을까.
언젠가 나 홀로 세비야라는 낯선 도시에 살아가고 있으리란 걸.
그것도, ‘루나’라는 이름으로.
그땐 세상이 서울로만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내 세상은 학교, 집, 골목 어귀의 문방구가 전부였다.
그런 내가 지금은, 이방인의 언어로 아침 인사를 건네고
낯선 화폐 속에서도 조금씩 루나라는 이름에 익숙해져간다.
익숙하지 않은 나라, 낯선 이름.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도시에서 나는 점점 나를 닮아간다.
이방인이었지만, 이제는 이 도시의 속도에 숨을 맞추고
그늘을 따라 걷는 법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안다.
그 시절의 나에게 지금 이 삶을 설명할 길은 없다는 걸.
하지만 그 아이가 언젠가 물어온다면,
나는 조용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괜찮아, 지금은 루나로 잘 살아가고 있어.”
세비야는 스페인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자, 안달루시아의 수도다.
그러나 대도시 특유의 분주함보다는 사람 냄새가 먼저 느껴지는 도시.
소도시를 선호하는 나에겐, 이보다 더 잘 맞는 곳도 없다.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와는 다르다.
세비야 사람들은 이웃 간의 정이 깊다.
한 번 얼굴을 익히면, 그다음부터는 꼭 안부를 묻는다.
인사는 예의가 아니라 일상이고, 생활의 일부다.
남편 리까르도와 한국에 살던 시절이 떠오른다.
어느 날, 그는 현관을 나서며 옆집 사람과 마주쳤다.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지만, 이웃은 무표정하게 지나쳐갔다.
리까르도는 내게 물었다.
“왜 인사 안 해?”
나는 대답했다.
“우린, 이웃이라도 먼저 인사 잘 안 해.
모르는 사람한테 말을 걸면 부담스러워할 수 있으니까.
다시 마주쳐도, 굳이 인사하지 마.”
그땐 정말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웃이라는 말의 진짜 의미를
나는 이 도시에서 천천히 배우고 있다.
낯설고 어색한 시간을 홀로 지나던 내 곁에
이제는 함께 살아낸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온,
마음으로 맺은 가족이 있다.
7월, 세비야의 낮 기온은 40도를 훌쩍 넘는다.
햇빛이 거리를 구울 때면 사람들은 조용히 그늘을 따라 걷는다.
그리고 나도, 그 그늘 속에서 이 도시의 시간을 배워간다.
세비야 사람들은 나처럼 서두르지 않는다.
그들의 속도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여유란 결국 함께 걷는 속도를 닮아가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웃과의 인사는 익숙해졌지만
나는 여전히 계산대 앞에서 환율을 떠올린다.
이 도시의 언어도, 행정도 아직은 낯설다.
배워야 할 것이 많고, 갈 길은 여전히 멀다.
그리고 한국인인 나답게,
그 조급함이 자꾸만 나를 누른다.
하지만 세비야는 언제나 따뜻하게,
거리마다 나에게 말해준다.
조금은 여유롭게 살아도 괜찮다고.
천천히 배워도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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