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저녁 8시의 중정기념당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의 미덕

by 디어





누군가 내게 9개월간 대만에 살면서 가장 특별한 장소가 어디였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단수이와 중정기념당을 꼽을 것 같다. 시간적으로 좀 더 여유로울 때는 단수이, 그렇지 않은 날은 중정기념당. 두 곳을 갈 때면 언제나 별다른 이유가 없었지만 이내 특별해지곤 했다.


중정기념당. 대만의 초대 총통이었던 장제스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여행객들은 주로 정각마다 열리는 근위병 교대식을 보기 위해 오지만 나는 수없이 방문하는 동안 교대식을 본 적이 한 번 밖에 없다. 2년 전에 처음 대만 여행을 왔을 때는 일정에 있지도 않았을뿐더러 사실 교대식이 열리는 낮에 중정기념당을 온 게 몇 번 안 된다. 내 중정기념당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해가 내려앉은 후였다.




Wish upon the moon

062.JPG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은 중정기념당


월요일은 슈퍼문이 떴다. 대만에서도 하늘이 검푸르게 보일 정도로 밝은 달이 걸려서 왠지 아쉬운 마음에 집 앞 놀이터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핸드폰 카메라로는 도저히 잡히질 않고 사람 눈으로 감았다 뜨면 눈에 담겼던 프레임 그대로 기억에 찍어 두고두고 보면 좋을 텐데. 아쉬운 마음 한 켠으로 이렇게 달이 밝은데 소원을 빌어야지, 그런 생각을 했는데 신나게 수다를 떨다 결국 잊어버렸지만 이틀 뒤 찾은 중정기념당에서 다시 휘영청 밝은 달을 만날 수 있었다.


대만은 동네 곳곳에 크고 작은 공원이 있고 해가 져도 서울 같은 휘황찬란한 밤과는 거리가 멀어서 나처럼 산책하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안성맞춤인 나라다. 딱히 한 것도 없으면서 한동안 꽤 바빴던 탓에 혼자 밤 산책을 다닐 시간이 없었는데 간만에 여유로운 하루가 생겨서 일찍 저녁을 먹고 집을 나섰다. 여유라는 건 그렇다. 바쁠 때는 한없이 귀찮게 느껴지는 요리를 해 밥을 차려먹고 한껏 느려지는 스스로에게 관대해진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음료수 하나 사 마실 돈만 챙겨서 목에는 오랜만에 카메라를 맨 채 한참 걸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집에서 중정기념당까지는 느린 걸음으로 30분 정도 걸린다. 서둘러 걸을 필요도 없고 누구 재촉하는 사람도 없다. 평소엔 뭐에 쫓기듯 걸음이 빠른 편인데 혼자 밤 산책을 할 때면 눈에 띄게 느릿느릿해지곤 한다. 좋아하는 음악을 흥얼거리며 중정기념당까지 걷는 길은 특별할 게 없지만 어느덧 나의 일상이 된 익숙한 중국어 간판들과 저녁을 사들고 퇴근하는 타이페이 사람들의 일상이 녹아있었다. 마침 꽤 선선해진 밤공기에 월요일만큼이나 밝게 걸린 달까지 모든 것이 어울려 완벽하게 여유로운 하루를 만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버블티가 아니라 맥주를 샀어야 했다.




세상이 느려지는 시간


저녁 8시. 한국에 있었다면 친구를 만나 카페에 갔거나 도서관에 있었을 거고 여행자의 입장으로 상상해보면 저녁을 먹고 이대로 하루를 끝내긴 아쉬운 마음에 부지런히 마지막 일정을 구겨 넣었을 시간이다. 대만 여행자라면 야시장을 구경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081.JPG


한국에 있을 때 내가 저녁 8시에 혼자 있거나 집에 있을 가능성은 0으로 수렴했다. 직장인보다 바쁜 대학생을 몸소 실천하며 이것저것 하기 바빴기 때문이기도 했고 지인들을 만나 저녁만 먹고 헤어지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기도 했다. 저녁 약속이 있는 6시나 집에 가는 버스를 타고 한강을 건너는 10시면 몰라도 8시는 그저 어중간한 시간이었다. 바쁘게 조각난 하루에서 특별할 게 없는 시간이 내게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게 여유를 의미한다는 걸 서울에서는 미처 몰랐다.


이제는 저녁 8시가 이상하리만치 모든 것이 느려지는 시간임을 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들어선 중정기념당에서 땅에 박힌 것처럼 달을 구경했다. 누군가 여행을 다니는 이유는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앉아 있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크다 못해 선명하게 성큼 다가선 달에 소원을 빌 생각조차 못했다. 내 눈에 보이는 것 반만큼만 담기길 바라며 사진을 찍는 것도 이내 그만두고 계단을 올라 한참을 서있었다. 무언가를 연습하는 고등학생들, 훈련 삼아 함께 계단을 뛰어오르는 사람들, 늦은 시간 찾아온 관광객들 혹은 나처럼 여유를 만끽하며 천천히 걸어 다니는 타이베이 사람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속에 나는 오롯이 혼자였다. 우주에서 내려다보면 먼지보다도 작을 하나의 존재, 특별할 것 없지만 나로서 특별한 존재로서.



093.JPG


밤에 중정기념당을 올 때면 왠지 모르게 먹먹해지곤 한다. 그동안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도 이곳을 찾았고 그냥 산책 삼아 걷고 싶을 때도 이곳을 찾았다. 천천히 담을 따라 한 바퀴 돌 수도 있고 조경이 예쁘게 되어 있는 정원을 산책할 수도 있는데 꼭 천천히 계단을 올라 본당 앞에 서서 국립극장과 음악당을 내려다봤다. 평소 고소공포증이 심해 경사가 심한 곳은 계단도 잘 내려가지 못하면서 본당 앞에만 서면 그런 두려움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곤 했다. 아니, 애초에 찾아온 적도 없다고 해야 맞는 말이겠지만. 절대 떨어질 리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아니면 그 위에서는 국립극장과 음악당이 아득하게 멀어 보여서였을까? 중정기념당은 훤하게 탁 트여 있는 곳이지만 아이러니하게 올 때마다 아늑하게만 느껴진다. 밤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서있어도 외롭지 않고 도리어 혼자임이 감사한 곳이 밤의 중정기념당이었다.


낮에 찾아와 교대식을 보는 것도 물론 좋은 경험이지만 한 번쯤은 해가 진 후에 찾아와 봤으면 좋겠다. 유명한 관광지인 동시에 지극히 평범한 타이페이 사람들의 일상을 품고 있는 매력적인 곳이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타이페이에 온다면 수많은 곳 중 가장 데려가고 싶은 곳이다. 이어폰으로 제일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천천히 계단을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당신도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네가 타이페이에서 이런 생각을 하며 이런 느낌을 받고 살았었구나, 하고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면 2016년 11월의 내 마음이 그에게로 가 닿은 거라고 조심스레 여기고 싶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