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이제까지 살아온 31년 삶 중 한 번에 무언가를 이루어본 적이 없다. 남들 눈에 띄는 특출난 재능은 없었고, 대학도 재수를 하여 들어가고, 공무원 시험도 3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했다. 매년 국가직-지방직-서울시를 쳤으니 9번은 쳤다는 소리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지만, 늘 남들과 같거나 더 많은 것을 지불하고 성취하는 전형적인 '범재, 혹은 그보다 조금 아래' 그게 나에 대한 평가였다.
반대로 동생은 한 배에서 태어났으나, 외모가 비슷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정말 다른 사람이다. 무언가를 배우는데, 특히 음악 쪽에 특출난 재능이 있었고, 대학도 한 번에 서울교대를 들어갔다. 물론 임용시험이 어려운 시험이니 이제 한번 넘어질 타이밍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아직까지는 크게 넘어져본 적이 없는, 나름 '수재'라고 평가받는 사람이다. 음악에 대한 재능은 형이 보기엔 아쉬웠으나 본인이 취미로만 하고 싶다는 의견을 보여 접었다.
이렇게 능력적으로 다른 두 형제가 같은 가정에 있으면, 우습게도 7살이나 나이 차이 나는 형이 동생에게 자주 느끼는 감정은 다른 정상적인 형제들과 다르다. '형제애'보다는 지독한 '열등감과 질투'다. 그리고 이 열등감, 질투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하게 된 27살 때부터 점점 몸집을 부풀리고, 공시생 마지막 29살 즈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이 되어있었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이 괴물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사건이 있었다. 2017년 마지막 서울시 시험에 어처구니없게도 시간을 잘못 써서 급히 마킹한 나머지 4과목과 5과목을 바꿔 마킹한 사건이었다. 심지어 제대로 마킹했다는 가정하에 채점을 해보니 1배수에 들어갈 꽤나 괜찮은 점수였다. 여기가 시작점이었던 거 같다. 애써 이성으로 눌러왔던 괴물이 세상 밖으로 나온 시작점이.
보통 그 괴물이 하는 짓은 이렇다. 부모님들이 취업 얘기를 하면 전혀 연관이 없는 동생 얼굴이 지나가면서 사람이 날카로워지고, 동생이 가끔 기숙사에서 강원도 집으로 돌아와서 쉬는 날이면 그 모습이 너무 꼴보기가 싫어 피하거나 늘 툴툴거리는 말투로 대화를 하게 된다. 스트레스가 아무 이유 없이 쌓이고 그걸 먹는 것으로 풀다 보니 살이 찐다. 그리고 이 열등감이 밤에 잘 때쯤 되면 '수치심'으로 변해 나를 갉아먹었다. 낮에는 가족을 갉아먹고, 밤에는 나를 갉아먹고.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이러다가는 정말 큰일을 내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 집 밖으로 나와 무작정 강릉으로 가는 버스를 끊었다. 숨을 크게 쉬고 바라보는 바다는 뭐든 품을 듯이 넓었다. 그 옆으로 작고 허름한 배가 지나가는데 그게 마치 내 모습 같아 보였다. 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흔히들 말하는 통통배였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배가 '운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녹슨 곳도 하나 없이. 문득 생각이 났다. 어쩌면 저 작고 허름해 보이는 배가 내 모습 같은 게 아니다. 내가 저 배보다 못할 수도 있다. 나라는 배가 있다면 그 배는 이미 너무 오래 멈춰서 목울대부터 가슴까지 녹이 슬어 있을 수도 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지옥에서 나갈 실마리가 나온 것 같다. 눈물이 났다. 애처럼 펑펑 울었다.
그 날 이후 한 첫 번째 일은 정리였다. 방에 있는 쓸데없는 것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이부자리, 먼지 쌓인 바닥과 책상까지. 이런 정리 중에서 가장 잘한 정리는 2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정리했다는 것이다. 집에 당당하게 '집 사정이 힘든 건 아는데, 마지막 1년 안에 붙겠습니다. 꼭이요.'라고 선언을 했다. 부모님의 어두운 표정을 보았지만, 찔림보다 뭔가 큰 짐을 내려놓은 느낌이었다. 이렇게 물리적, 정신적인 정리를 마쳤다. 마침내, 정말 해야 할 것만 내 방에 남은 것이다. 몸도 다이어트가 필요하듯 마음도 다이어트가 필요했던 것 같다.
두 번째는 인정이었다. 나는 동생처럼 빠르게 무언가를 익힐 수는 없다. 통통배와 크루즈는 전혀 다른 배다. 크루즈는 크루즈의 방식으로 바다를 건너고, 통통배는 통통배의 방식으로 바다를 건너면 되는 거다. 처음부터 어쩌면 나는 문제를 잘못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동생은 이렇게 뛰어나다'에 초점을 맞춰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잠들었던 것이다. 그게 너무 긴 시간 동안 잠이든 나머지 멈춘 것이 문제였다. 녹이 슬어가고 있었다. 그것도 녹가루를 주변 사람들한테 뿌려가면서.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니 너무나도 단순한 문제였다. 그냥 나는 그런 사람이고, 그 사실에 묶여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묘했다. 아직 완전하게 열등감과 질투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 감정 자체를 이제는 괴물이라고 부를 정도로 과장하지 않게 되었다. 열등감도, 질투도 그냥 자연스럽게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거니 하면서 받아들이게 되었다.
마지막은 사과와 화해였다. 술의 힘을 좀 빌리기는 했다. 맨정신으로 동생한테 이걸 얘기할 엄두가 안 났다. 너가 죽도록 미웠고, 제발 나에게도 너가 아니라 평범한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서툴고 두서없는 말에 동생은 그냥 묵묵히 듣기만 하더니, '괜찮아 뭐, 나름 이제까지 형 덕을 본 것도 있으니까. 쎔쎔하지 뭐...' 생각보다 너무 쿨한 대답이었다. 이렇게 쉬운 일을 굳이 그 먼 길을 돌아 돌아왔다. 개운했다. 용서를 받음으로 나를 용서하게 되었다. 실타래가 다 풀린 느낌이었다.
그 후부터는 속도는 더뎠지만, 적어도 다시 뒤로 가지는 않는 하루하루가 쌓였다. 실질적인 문제에 정면돌파를 하기 시작했다. 일단 망가진 몸부터 바로 잡았다. 규칙적으로 생활만 해도 4kg이 빠졌다. 운동을 병행하니 8kg이 우습게 빠졌다. 공부도 이제는 기계적으로 하지 않았다. 회사를 다닐 때보다 치열하게 계획하고, 일지를 써서 하루하루를 비교했다. 무언가에 몰입하는 경험을 정말 오랜만에 느꼈다. '그래, 이거지...'라고 무릎을 여러번 쳤다. 또한 열등감과 질투가 작아지니, 바로 옆 동생은 가장 쓸만한 아군이 되어 있었다. 동생이 집에 올 때면 옆에 붙여놓고 도움을 받았다. 공시 생활은 늘 마지막 순간이 힘들다고들 하지만, 오히려 나는 그 한 해가 공시 생활 3년 중 제일 행복했다. 합격은 그저 부산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2020년 1월부터 지금까지 이 비슷한 이야기가 우리 집에 펼쳐지고 있다. 동생이 임용고시에서 떨어졌다. 그것도 면접에서. 처음으로 세게 넘어져 본 탓일까, 내상이 매우 심해 보인다. 이제까지는 자기가 노력하면 어지간히 공부에 관한 것들을 취할 수 있었던 녀석이 풀이 팍 죽어서 집에서 콕 박혀 있는 걸 보면 내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마음이 짠해진다. 못된 것만 형한테 배워서 몇 개월째 신경도 날카롭다. 아마 지금 동생의 열등감과 질투의 대상은 먼저 합격한 동기들 일 것이다. 일단은 지켜만 봐주기로,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줄 준비만 하고 있다. 언젠가 동생에게도 '강릉 앞바다 위 통통배'와 같은, 실패가 주는 열등감을 태워 기적을 일으키는 경험이 찾아오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