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소나기 이후 처음 읽어보는 국내 연애(?) 소설

by MinChive

<이제까지 읽은 책들과는 조금 다르게, 소설이다 보니 스포일러가 있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최대한 뺐지만, 책을 사고 완독을 목표로 하고 계시다면, 뒤로가기를 누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소설, 특히나 연애소설 쪽은 즐겨 읽지 않는 분야였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봤던 '소나기'가 첫 연애소설이었고, 그 뒤로는 학부 때 과제 때문에 억지로 읽었던 셰익스피어나 몇몇 너무나 유명한 작가들의 책들이 전부였다. 누구나 다 읽는 알퐁스 도데의 '별'이라든지,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이라든지, 그나마 최근에 써진 책들 중에 재미있게 본 기욤 뮈소의 책들이 있지만, 이 분의 책은 판타지 소설같은 요소가 (시간을 돌린다든지/본인이 책으로 썼던 여주인공이 현실로 나온다든지 하는 것들) 있었다. 어느 쪽이든 너무 오래된 이야기이거나, 판타지적 요소 때문에 현실하고는 떨어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읽어본 연애소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는 그에 비해 굉장히 현실적이다. 일단, 배경이 강원도다. 하지만 아마 그냥 작가가 앞에 강원도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혜천시'라는 가상의 공간으로 만들었어도 강원도에 살아봤던 사람이라면 '아, 강원도를 배경으로 썼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강원도 사람만이 아는 강원도의 겨울이 참 잘 나타나 있다. 눈 덮인 풍경은 말할 것도 없고 겨울만 되면 한두 군데가 아니라 온 동네가 수도가 터져 고생하는 장면이라든지 논두렁에 만들어진 스케이트장이라든지, 밭에 나와있는 마시멜로까지 그냥 우리 동네(평창)의 겨울을 글로 표현하라고 하면 이렇게 쓰면 되겠다 싶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소설을 바탕으로 찍은 동명의 드라마는 옆 동네 영월에서 찍었다. 그래서였을까, 모든 상황이 눈에 그려지듯 했고, 몰입이 되었다.


이 책의 또다른 매력은 중간중간 나오는 굿나잇 서점 블로그의 '비공개 글'이다. (인물의 감정을 잘 보여줄 수 있는 훌륭한 장치라고 생각한다. sns의 특징을 잘 이용했다.) 은섭의 감정이 풀리는 일기라고 봐도 무방한데, 주옥같은 글귀도 많이 나오고, 작가가 가상으로 만든 책이기도 하지만 굿나잇 서점에 들어오는 책에 대한 소개가 있다. 실제로 있는 책이었으면 좋겠다 싶은 책들도 다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거는 취향에 따라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을듯한데, 이 책의 주된 이야기가 얼핏 보면 해원과 은섭의 사랑이지만 자세히 읽다 보면 더 심정적으로 끌리는 이야기는 각 인물들이 상처를 해결하는 과정이다. 이 책의 겉표지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여기서도 감이 온다. '서로에게 많이 미안한 이들이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보고 싶다고, 후회한다고, 용서해달라고, 이미 용서했다고... 그 말들을 비로소 용기 내어 전하는 이야기'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책의 처음 부분을 읽었을 때는 이 문구가 왜 있나 싶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소개가 너무나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사다난한 가족관계에서 시작된 상처, 서울에서 혜천으로 내려오기까지 사람으로 인한 상처가 너무나도 많은 해원, 고아로 자란 은섭, 형부를 차로 쳤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명여, 해원과의 화해에 목마르고 해원의 무시에 상처 받은 보영까지... 어떻게 보면 굉장히 드라마나 영화같이 다른 이야기들에서 많이 본듯한 느낌을 줘서 지루하다 느낄 수도 있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상처를 극복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작가가 담백하면서도 아름답게 그려내기 때문에 감동을 받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 책을 보면서 그래서 그랬는지, 제일 많이 들은 노래가 선우정아의 '도망가자'였다.)


* 갑자기 든 생각 1.: 모든 시골 동네가 해천읍 같았으면 한다. 텃세는 울창한 산동네를 사막으로 만든다.

* 갑자기 든 생각 2.: 1 마을 1 굿나잇 책방이 시급하다. 어디 누가 그런 거 안 만들어주려나?


<책 속에서>


- 62p. 우리는 난롯가에 마주 앉습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말합니다. 어느 밤, 새벽이 올 때까지 잠 못 들고 서성이다 문득 생각했어. 이렇게 밤에 자주 깨어 있는 이들이 모여 굿나잇클럽을 만들면 좋겠다고. 서로 흩어져 사는 야행성 점조직이지만, 한 번쯤 땅끝 같은 곳에 모여 함께 맥주를 마셔도 좋겠지. 그런 가상의 공동체가 있다고 상상하면 즐거워졌어. 누구에게도 해롭지 않고 그 안에서 같이 따뜻해지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서로에게 굿나잇, 인사를 보내는 걸 허황되게 꿈꾸었다고.

- 191p. 혼자일 때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고, 외로움에서 배우는 일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기대하는 바가 적을수록 생활은 평온히 흘러가니까. 진정으로 원하는 게 생기는 건 괴롭다.


- 278p. 이 밤, 너를 오두막에 데려가고 싶다고 생각을 해. 내 몸에 등을 대고 깊이 잠든 너를 이대로 이불로 감싸 안고 숲의 오두막으로. 그리고 백일쯤 내려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봄이 오고 벚꽃이 피었다 지고, 산길에 라일락과 아카시아 향기가 코를 찌를 때도 우리는 그 집에서 사랑을 나누고 불을 때고 밥을 지어먹으며 숨어 있겠지. 책방? 알 게 뭐야. 사랑하는데 책 따위가 필요할 리 없잖아.


잘 자요, 내 침대에서 잠든 사람.

인생은 그리 길지 않고 미리 애쓰지 않아도 어차피 우리는 떠나.

그러니 그때까지는 부디 행복하기를.


눈이 와. 너는 자는데
나 혼자 깨어서 이 함박눈을,
밤눈을 보고 있네.


- 387p. 오랫동안 기록을 계속하다 보면 오늘 날짜의 부피가 생긴다. (…)

올겨울 그녀가 내게 다가왔을 때, 우리가 사랑을 나누었을 때, 그 날짜들은 더 이상 균일한 평안함으로 쌓이지 않고, 오늘의 부피는 이전과는 달라졌다. 내년부터는 겨울이 와도 지금까지와 다를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다가올 겨울의 부피.


- 382p. “내가 가장 두려운 건, 하는 일이 잘 되지 않거나 실패하는 게 아니야. 농담할 수 없는 상황이 오는 게 제일 두려워. 왜 말을 하지 않느냐고? 농담이 안 나와서 그래. 너를 웃겨줄 말이 생각이 안 나서.”


- 404p~405p. ‘우리 매니저님, 잘 지내지? 좋은 일들만 있기를 기원해. 살면서 교훈 같은 거 안 얻어도 되니까. 좀 슬프잖아. 교훈이 슬픈 게 아니라 그걸 얻게 되는 과정이. 슬픔만 한 거름이 없다고들 하지만 그건 기왕 슬펐으니 거름 삼자고 위안하는 거고… 처음부터 그냥 슬프지 않은 게 좋아. 물론 바라는 대로 되면야 얼마나 좋을까만.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네. 늘 그리워요.’


- 119p. ... 사실 유사 이래 모든 과거는 한 번도 완료된 적이 없다.


그리고, 책 속에 담긴 문구 하나 더.


책을 읽어서 고통이 사라진다면, 진짜 고통이 아닙니다.

책으로 위안을 주겠다는 건, 인생의 고통을 얕잡아 본 것입니다.

-샤를 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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