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입대를 환송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은 막힐 것이 뻔했기에 고속도로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커피를 마시러 들어간 카페에서 어색한 분위기를 풍기는 한 커플을 보았다. 하필이면 남자가 군복을 입고 있어서 더더욱 내 시선에 박혔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지 못하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 사이에 찬바람이 불고 있지도 않은 것 같았다. 어차피 갈 길이 멀었던 난 그들의 옆에 앉았다.
"보고 싶었어"
라는 문장이 선명하게 들렸다. 아마도 그들은 호감을 느끼며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가 아니라,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듯했다. 그게 아니면 저 시선처리와 저 표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 '재회'라는 두 글자가 순간적으로 확 머리속에 쓰인 뒤 사라졌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기억 어딘가에 있던 영화 <비포 선셋>의 줄거리가 생각났다. 흔히 비포 시리즈라고 불리는 3부작 중에 두번째 영화, 아무리 1편을 이기는 2편은 없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비포 시리즈 3부작 중에 제일 좋았던 영화기도 했다. 빈에서의 하룻밤 불같은 사랑 이후 9년이 지나, 빈이 아닌 파리에서 우연히 재회하는 두 연인의 이야기. 이미 제시는 결혼도 했고 서로 연락을 하지 않은 채 지내온 두 사람이었지만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었고, 제시는 그 빈에서의 하룻밤 경험을 소재로 한 로맨스 소설이 성공을 거두며 셀린이 사는 파리에서 인터뷰를 하다가 셀린을 만나며 시작하는 이야기인데, 대화 하나하나가 참 재회라는 것의 속성을 잘 나타내주는 영화여서 더더욱 기억에 남는다. 단, 영화와 현실은 다른듯하다. 영화 속에서 둘은 오랫동안 마음의 밑바닥에 간직해온 소중한 감정을 다시 꺼내 서로에게 보여준다. 심지어는 "다시 만났으니 추억을 바꿀 수 있어"라는 말을 제시는 한다. 여기서 잠깐 몰입이 깨졌다. 현실에선 한가지 경우가 더 있다.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서로의 길이 영영 엇갈리는 경우다.
누구나 그렇듯 나도 열렬히 사랑했으나 아쉽게 작별을 고했던 사람과 세월이 지나 다시 만난 경험이 있다. 그때만 해도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뻔한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이별이라는 서로의 밑바닥을 보여준 경험을 통해 우리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고, 어떤 벽이 세워졌는지 이미 충분하게 알았으니 그걸 해결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믿음이 있었다. 어렸어서, 서운해서, 불안해서 생긴 착오였다. 이후의 과정은 전혀 순탄하지 않았다. 과거보다 더 잘 알기에, 훨씬 버겁고 생생하게 모든 장애물들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음을 느꼈다.
나이가 들고 이제야 좀 아이를 벗어난 지금에서야 어렴풋하게 깨달은 것이 있다. 연인간의 재회는 이전 사랑의 연장이나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해후가 아니라, 이별로 인해 삶을 크게 비틀어버린 두 사람이 새로 시작하는 별개의 사건, 혹은 별개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진실로 그러하다. 재회하며 만나는 사람은 과거에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이지만 동시에 그 사람이 아니기도 하다. 앞서 말했던 비포 선셋에서 셀린은 이런 얘기를 한다. 제시의 추억을 다시 바꿀 수 있다는 얘기는 충분히 낭만적이지만, 난 오히려 이 대사가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 날 밤 난 내 모든 것(=all my romanticism)을 쏟아 부어서,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어.
이런 이유로, 재회는 낯설고 불확실하다. 한번 이별했다가 재회한 연인들이 "처음 좋았을 때로 돌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고 입을 모으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