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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Chive Oct 13. 2024

15. 'TR'ust vs 'M'ust, 믿음에 대하여


   ‘믿는다’는 말은 진짜 믿기 힘든 말이다. 예전에는 나도 참 많이 썼던 말인데 한 살 한 살 먹어가는 어느 순간부터 함부로 쓰지 못하게 되는 말이 되어버렸다. ‘이 좋은 말을 왜?’하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이 선한 말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늘 그렇듯이 본뜻과 달리 왜곡하여 사용하는 사람, 사람이 문제다.

     

    신입을 이제야 겨우 면한 나에게 신입시절은 ‘믿음의 시대’였다. 그 ‘믿는다’는 말을 듣고 야근을 밥 먹듯이 했다. 신입직원 특유의 열정과 패기도 있었지만, 그때는 무엇보다 그런 말을 듣는 것 자체가 좋았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고, 인정을 받는다는 느낌은 사람들을 들뜨게 한다. 없던 힘도 생기는 마법같은 기분이 든다. 믿음을 저버리면 안돼서 이를 악물고 분발했다. 그 말이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묶는 쇠사슬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쇠사슬의 무게는 해가 갈수록 늘어갔고, 결국 몸에서 이상 신호가 오고 나서야 내 몸에 그 무거운 사슬이 묶인 것을 알았지만, 잃어버린 건강을 다시 찾아오는 데는 몇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믿음이 차라리 나에게만 사슬이 되었다면 마음이라도 오히려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널 믿는다는 그 말이 좋았으므로 나 또한 나의 친구에게, 나의 가족에게,  나의 후배에게 이 말을 서슴없이 했다. 나는 정말 순수하게 그들을 믿었던 걸까? 믿었던 마음이 어긋나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실망감을 넘어 배신감까지 느끼는 나를 발견했다. 믿는다는 말이 정말 믿는다는 선의의 말이 아님을 깨달았다. 부끄러운 자기 반성의 시간이 찾아왔다.     


    그 후, 믿는다는 말의 진짜 의미에 대해 헤아려보려고 했다. 약속을 지켜라, 기대를 져버리지 마라, 실망시키지 마라, 내 뜻을 거스르지 마라. 기필코, 어쩌면 너를 망가뜨리고, 희생시켜서라도 해내야만 한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믿는다는 말 속에는 이런 더러운 것들이 숨어 있었다. 이토록 숨이 막히는 말을 나는 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버젓이 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믿음은 기대와 대가의 합작품이다. 이제는 주고받음이 있어야 ‘믿음’의 상관관계가 성립한다. 믿음을 부여받은 자는 믿음에 부응해야만 하는 의무가 발생한다. 믿음을 준 대상에게 잘 보여야 할 필요와 욕구가 크면 클수록 부담과 압박도 커진다. 그렇기에 이 믿음은 함부로 가질 일도 아니고, 끝까지 지켜내는 일도 만만치 않다. 요즘 믿음은 오히려 ‘거래’에 가깝다.     


    이쯤되면 궁금해진다. 회사와 사회생활에서 쓰는 '믿음'과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중히 여기고, 고귀하다 생각하는 '믿음'은 어디서 차이가 나는 것일까?


    ‘믿음’이라는 말이 처음 태어났을 때를 상상해보았다. 우리 인류는 무엇을 믿었을까? 우리의 머나먼 선조들은 성과에 대한 미래의 기대치 같은 것을 믿지 않았다. 믿음은 그러니까 우리가 요즘 통상적으로 쓰는 의미의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리라. 첫 믿음은 여기에 없는 것, 미래에 대한 기대치가 아니었을 것이다. 믿음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것,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을 확인하는 현재였다. 우리 선조들은 우리가 곰의 자손이라고 믿었다. 천둥을 보고 신이 노하였다고 믿었고, 나무를 믿었고, 물과 불을 믿었고, 별을 믿었다.     

 

   그다음에는 아마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었을 것이다. 꽃이 핀 것을 보고 봄이 온 것을 믿었고, 낙엽이 진 것을 보고 겨울이 온 것을 믿었다. 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것을 보고 아이가 사랑받고 있음을 믿었고,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바람이 있다는 것을 믿었고, 수평선 위로 올라오는 돛배를 보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믿었다. 믿음이란 있음을 인정하고, 지금을 받아들이고, 존재함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중시 여기고, 고귀하다 하는 ‘믿음’은 아마 이런 종류의 마음들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언제인지 모르겠으나 이상한 마음이 쳐들어와 본래 있던 믿음에 이상한 곁다리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샌가 믿음의 자리를 대체했다. 그 이상한 마음은 이 숭고한 믿음을 하찮아하고, 심지어는 믿음이란 것이 보이지 않기에 자기 마음대로 가격표를 달고, 가치를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그 이상한 마음의 이름은 욕심이었다. 욕심이 마음자리를 차지하자 마음 안에 있던 천둥과 별과 곰과 사람이 쫓겨났다. 믿지 않는 마음이 믿는 마음을 쫓아냈다. 그때부터는 신도 나무도 사람도 나의 마음도 믿음이 아니라 믿어야 하는 존재, 있는 게 아니라 있다고 믿어야 하는 신앙이 되었다.    

 

   그렇게 믿음이 순수하게 믿음 자체였던 마음의 시대가 조금씩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믿음에 대한 대가로 ‘복’을 바랐고, 그런 믿음을 이용해 힘을 얻는 자가 생겨났다. 그렇게 욕심이 섞여버린 믿음은 지배와 복종 관계를 만들어냈다. 믿음이 보이도록 형상을 만들고, 이적을 행한 이야기를 만들고, 믿고 지켜야 할 말들을 경전에 기록해 퍼뜨렸다. 그렇게 믿음은 스스로 전지전능해졌다. 동시에 믿음이라는 것은 순수한 의미를 잃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 믿음은 불공정한 거래를 합리화하는 무기가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지금, 오늘날의 사람들은 숫자와 문자로 세워진 것만 믿는다. 집도 땅도 계약서로 주고 받고, 믿는다는 것은 마음이나 말이나 사랑을 뜻하지 않게 되었다. 너를 믿는다는 말은 너를 확인할 수 있게 숫자로, 문서로, 결과로 증명하라는 말이 되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우리가 사는 방식이 변해야 한다. 이러다가 우리 세상은 실제로 마음에 풀 하나 안 나는 삭막한 사막으로 변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삭막한 사막과 같고, 이 상황이 심해진다면 우리가 이 사막을 건너는 방랑자들과 많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사막을 관광하러 온 사람이 아니라 사막을 탐험하는 존재들이다. 관광에는 챙 넓은 모자와 카메라만 있으면 되겠지만, 생존에는 타인의 협력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이제까지 우리는 믿음을 그렇게까지 강조했던 것이 아닌가?      


   내가 낙타를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물주머니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렇기에 내가 낙타를 몰아 모래폭풍을 헤쳐나가면 당신은 간간이 물주머니를 내게  건내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우리가 사막을 건너가는 이유에 대해 내가 잊지 않도록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나에게 말해주리라 믿는다. 어쩌면 그러다 이 사막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리라는 믿음으로 조그마한 나무 하나를 심고 지나갈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비로소 당신의 믿음과 나의 믿음이 단지 서로 살아남기 위해 하는 거래가 아닌 더 큰 무언가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리라고 믿는다.          


   탐욕의 언어로 믿음을 정의하지 말자. 믿는 마음을 더럽히지 말자. 믿음은 바라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그저 자신의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다. 나의 유익과 기대 때문에 누군가를 힘들게 하거나 자신을 옭아매게 해서는 안 된다. 나의 욕심을 잠그는 일이다. 나 하나 사막에 나무를 심어 달라지겠냐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이 세상에는 있다. 심지어 그 사람들이 다수가 되어가는 세상이다. 세상이 그렇게 쉽게 변할 거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는 거냐고, 그런 여리디 여린 마음으로 뭘 할 수 있겠냐고 물을 것이다.      


    답은 이미 과거의 사람들과 현재의 우리가 해줬다. 사실 믿음이란 것은 그렇게 순진하고 여린 마음에서 시작했다고, 욕심이라는 불순물이 섞인 믿음이 지금 우리를 괴롭히고 있고, 결국에는 세상을 사막으로 만들고 있다고 대답하리라. 이제부터 나는 내가 심은 나무에 핀 꽃이 또 다른 씨앗을 맺고 언젠간 이 사막이 숲이 되리라는 진짜 믿음, 그것을 찾았다고 대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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