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는 인생만 살다 보면, 자신이 뭐가 하고 싶어 이곳에 있는지 점점 알 수 없어진다. 아무튼 살아보자고,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생각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때론 이렇게 사는 것은 느린 자살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느낌이 든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그녀에 대하여> 앞부분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처음에 이 구절을 읽었을 때는 이 말에 200% 동감했다. 한창 어리고, 마침 또 공교롭게도 기회가 좋아 미국에 교환학생 생활을 하던 꿈 많던 시절이었으니, 얼마나 이 말이 나를 위한 말 같았을까? 오늘은 이 문장을 읽으니 막막해졌다. 어디론가 훌훌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 수첩에 적어놓고 자신의 떠남에 대한 정당한 근거, 나쁘게 사용하면 도망에 대한변명으로 삼기에 적절해 보였다. 몇 년 전 나라면 아주 진한 형광펜으로 밑줄을 박박 그어댔을 말이다. 오늘은 이 문단에 흐린 동그라미를 친 후 '?'를 쓰려다가 샤프심이 툭하며 부러졌다. 마냥 동의를 할 수 없는 불편한 마음이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오늘을 즐겨야 내일이 온다고 믿는 사람이 있고, 내일을 위해 오늘을 견디는 사람이 있다. 오늘을 즐기는 사람은 내일을 과감하게 처분해 배낭을 꾸려 여행길에 오른다. 오늘을 견디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의 홀가분한 뒷모습을 보며 자신이 견디고 있는 오늘의 성실이 옳은가를 괴롭게 고민한다. 즐기는 사람은 현실에 붙들린 하찮고, 옹색하고, 답답한 삶을 연민한다. 견디는 사람은 떠나는 사람의 결단과 용기를 동경한다.
해외 생활 경험이 1년 정도밖에 안 되지만, 나름 그 1년 동안 참 부지런히도 여러 지역을 다니며 자유롭게 다녀봤다. 자유인, 휴머니스트, 방랑자, 구도자 등의 이름표를 달고 즐기는 자는 여행길에서 수많은 현지인들을 만난다. 그들은 여행자에게 늘 관대하고 친절하다. 그들은 여행자들에게 자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주는데 인색함이 없다. 그중에 하나, 기억 속에 남는 사람은 뭐라 해도 교환학생으로 있던 대학에서 동아시아사를 가르치던 교수였다. 그는 한/중/일 세 나라에 대해 관심이 많았으며, 그렇다 보니 학교에 몇 없는 한국학생인 나에게 수업자료를 보여주며 본인이 놓친 부분이 없는지 확인을 하곤 했다. 그 열정이 보기에 좋아 자발적으로 그의 강의 자료 만드는데 도움을 주다 보니 어느샌가 그의 단란한 저녁 식사에 초대를 받아버렸다.
그때 모닥불을 피우며 그와 했던 대화 중에 기억에 남는 대목이 있다. 모닥불을 피우고 마시멜로가 익기를 멍하니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나는 육십 평생을 여기서 공부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살아왔네. 여기 있는 내 집과 가족 이게 나의 전부지.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삶이지. 자네는 무엇을 찾아 이 먼 곳까지 왔나?"
그때 당시는 이 질문에 대해서 뭐라 할 말이 없어, 순간적으로 찾아야 할 '그것'이 뭔지 알고 싶어서 왔다고 대답을 했다. 그때 그의 대답은 "역사적으로나 내 개인적인 삶을 돌아봤을 때나,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였다. 이 문화권의 교수들은 대부분 진취적인 성향이 강했다. 프런티어 정신의 탄생지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 나라 교수의 입에서 꽤나 동양적인 대답을 들어 퍽 인상 깊었다.
나는, 즐기는 자는, 떠나온 자는 알게 되었다. 여행길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결국 자신의 삶터에서 오늘을 즐기며 사는 사람들임을. 갑자기 눈이 매운 것이 타오르는 모닥불 때문이었는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열기를 식히려고 잠깐 위를 올려보니 별빛이 참 예뻤다. 저 별이 한국에서 본 별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내가 떠나온 그곳에 여기, 이곳의 삶들이 있었구나. 견디는 삶이 초라한 것이 아니라, 정작 외롭고 가여운 것은 삶에 대한 너무 이르고 편협한 내 단정이었구나. 그 후 조금은 사는 것에 대해, 관점이 좀 많이 바뀌었다.
헌신과 희생은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나를 위한 것이어도 어떠한 형태로든 본인의 삶을, 행복을 갉아먹는다. 행복을 미루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걸 근데 버티는 사람이라고 모를까? 지금을 버티는 건 나중에 버티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라는 진부한 명언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니다. 오븐의 시간을 인내하는 건 맛있는 빵을 먹기 위해서인 것처럼.
버티는 사람은 목적이 분명하다. 목적이 분명치 않다면 그토록 버틸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버틸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기에 버틴다. 힘겹게 버티고 있는 사람에게 욜로라느니, 즐기면서 살지 왜 바보같이 참고 있느냐고 말하는 것은 그 삶에 대한 모욕이다. 아무리 인생이 고해고 고통이라고 하지만, 요시모토 바나나의'버티는 인생'이라는단어 선택은 조금 선을 넘어 지나친 것처럼 보였다. '인생'을 버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 가운데 '버텨야 할 어느 때'를 담담하게 버티는 것일 테니까, 그런 의미로 조금 수정했으면 내 심사가 조금은 덜 꼬이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삶의 무게에 눌린 사람들은 삶이 투쟁이라고 말한다. 힘겹게 버티고 있는 사람들은 삶을 고통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도 안다. 무언가에 '대항하는' 삶보다 무언가를 '위해서' 사는 삶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그래도 그들은 오늘도 버티고 산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을,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을 기꺼이. 지금 내가 행복하다면, 그 행복은 얼마간 버텨낸 시절의 고통에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지금 버티고 있는 사람을 보거든 어리석다고 비웃지 말자. 값싼 동정도 하지 말자. 불행할 거라고 지레짐작하지도 말자. 그저 손을 가볍게 흔들어 인사하고 본인의 여행을 떠나자. 떠나가서 지금을 버티는 사람들의 몫까지 삶을 느끼고 오자. 부디 어떤 경우에라도 나의 행복을 유예하거나 구걸하지는 말자. 버티는 순간에도 행복한 사람들은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