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nChive Oct 01. 2024

12. 만원이십니다

    삐빅, "만원이십니다." 카페에서도 편의점에서도 물건값을 존대해서 말한다. 국어시간에 잘못된 표현이라고 그렇게 배웠음에도 고쳐지지 않는다. 심지어 그렇게 말해주지 않으면 손님들의 불평이 나와서 위에서 그렇게 말하라고 교육을 받는다는 사람도 꽤나 된다고 한다. 도대체 언제부터 사람보다 물건을 더 높이는 괴상한 호칭법을 만들어내고 과잉친절을 추구하게 되었을까?


    친절은 사회생활을 할 때 필요한 덕목 중에 하나다. 이건 바뀔 수 없다. 개개인의 고유한 성향인 상냥함을 교양의 덕목으로 사회한 말이 친절일 것이다. 직장에서 요구하는 태도라는 것, 인성이라는 것, 자질이라는 것, 그 말들의 바탕에 깔린 것이 사실 친절이다. 고분고분하고 나긋나긋하게 위계에 따르라는 무언의 압박이 친절 안에 조금 함유되어 있다. 그러므로 친절이라는 말은 태생적으로 조금은 음흉한 계급성을 숨기고 있다. 선함이라고 가리고 있지만 권력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친절을 강요받다 보면 감정은 억눌리고 자존감은 뒤틀린다.


    사회적으로 들여다보면, 갑과 을은 물론이고 우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게 포장된 신분 사회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진 자들은 더 가지기 위해 힘없는 자들의 무릎을 억지로 꿇리고, 약자의 비굴과 약자의 체념과 약자의 인내를 양분 삼아 살을 찌운다. 천박함을 넘어 악랄한 사회다. 왜?


    몇 달 전, 미국에서 주목받는 작가 마크 맨슨이 한국 사회에 대해 조명했다. 맨슨은 ‘신경 끄기의 기술’ 등 유명 자기 계발서를 집필한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는 한국이 경제·문화적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이면에는 한국인들의 깊은 우울증 문제가 자리하고 있으며, 이는 유교와 자본주의의 장점을 무시하고 단점을 극대화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만원이십니다."라는 말도 그 결과물 중에 하나가 아닐까?


    우리나라는 유교를 내세워 윗사람에 대한 존경과 예의를 철저하게 가르쳤다. 그게 인간됨의 기본이라고 단단히 세뇌시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사회는 단 한 번도 아랫사람을 대하는 윗사람의 태도와 예의에 대해 가르쳐본 적이 없다. 나이와 권위에 상관없이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는 법을 배워본 적이 없다. 모든 것이 윗사람을 향한 순종과 충성이었다. 먹고사는 것이 우선이라는 핑계로 온갖 자본주의적 요소들을 수입했으면서도 정의와 윤리와 존중의 교양자원은 들여오지 않았다.


    그 결과, 다 그런 것은 아니라지만, 꽤 다수의 사람들이 걸핏하면 나이를 앞세우고 어린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서 그것이 자신들의 당연한 권리인 듯이 언제 어디서나 대접받으려 든다. 그들의 자녀들은 돈이 있고 없고를 가지고 서로를 비교하고 저울질하고 있다. 왜곡되고 병든 사회가 되었다. 운전면허처럼 어른면허를 만드는 법을 제정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외국 여행을 하다 보면 느껴지는 게 있다. 경제적으로 우리보다 못한 나라에서 특히 더 느끼는 부분인데, 물건을 팔고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당당하고 담담하게 친절한 사람들, 친절이라는 것은 원래 이렇게 동등한 상냥함이고, 자연스럽게 나와야 한다. 그들 중에 분명 헐벗어서 머리를 조아리거나 손바닥을 내미는 사람이 있을지언정 비굴의 그림자는 엿보이지 않는다. 가난에 사로잡히지 않은 해맑은 영혼이 눈동자 속에 있다.


     서열과 계급을 바탕으로 하는, 심지어 그것이 돈을 바탕으로 구축되는 관계는 결코 모두에게 좋은 관계가 될 수 없다. 주고받음의 크기와 상관없이 평평해야 평화로워진다. 우리 사회는 친절이 아니라 존중을 가르쳐야 한다. 물건이 아니라 사람을 높이는 정상적인 사회가 되려면 이 기형적인 친절에 대한 강요는 없어져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