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삼신'아저씨, 난임 전문의
나는 수능 세대다. 우리 땐 대학 가는 방법이 아주 단순했다.
일단 수능 준비를 열심히 한다. 매달 수능 형식의 모의고사를 치르고, 서점에서 수능형 문제집이나 모의고사를 더 사서 공부한다. 수능을 본다. 수능 점수 커트라인에 맞춰 대학과 학과를 정해 지원한다. 끝.
'학종' 은 수험생보다 학부모들 골머리를 아프게 하는 입시 방식인 것 같은데, 자세히는 몰랐다.
이번에 드라마 <스카이캐슬>을 보며, 아주 일부지만 학종의 복잡미묘함을 조금은 들여다볼 수 있었다.
수능만 보면 대학에 갔듯, (피임 없는) 섹스만 하면 임신이 될 줄 알았는데...
난임은 학종으로 대학에 가는 것만큼이나 여러 변수를 생각하게 한다.
내신성적은 기본, 전교회장도 하고 봉사활동이랑 독서토론까지 해도 서울 의대에 불합격할 수도 있다.
영양제 챙겨먹고 술담배 끊고 카페인이랑 인스턴트 줄이고 두유랑 포도즙도 먹고 안 하던 운동도 하고
결국 시술까지 해도, 임신에 실패할 수 있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지? 다음엔 뭘 더 해야 하지?
앞이 안 보이는 길에 서 있을 때 우리는 절대자에게 의지하게 된다.
목적지까지 갈 수 있게 해주겠다고, 확신에 찬 얼굴로 약속하는 쓰앵님을.
나도 그렇다.
학창시절에도 거의 부를 일 없던 '선생님' 소리가 5분도 안 되는 진료시간 동안 열 번은 튀어나온다.
두 손 모으고 선생님의 한 마디 한 마디를 계시라도 받듯이 새겨듣는다.
그렇다. 나의 쓰앵님은, 난임병원의 담당선생님이다.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난임병원 중 한 곳을 고른 뒤 담당의를 선택할 때, 내 기준은 '얼굴'이었다.
따뜻한 인상이었으면 했다. 공감해주는 눈빛을 가졌으면 했다.
간혹 난임병원 후기에서 보는 것처럼, 담당의 때문에 또다른 상처를 받게 될까 두려웠다.
초음파를 본 후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 커튼 너머로 다음 일정을 설명하는 의사도 있다고 했다.
늘 바쁘고, 기다리는 다음 환자를 배려해서일 수도 있지만, 마음이 상할 것 같았다.
우린 이미 충분히 상처 받았는데.
병원 홈페이지에는 의료진의 사진과 프로필, 인터뷰 동영상까지 있었다.
한 분 한 분의 사진을, 맞선 볼 남자 고르듯 신중히 들여다봤다.
그리고 결정했다. 곰돌이 푸를 닮은 둥근 얼굴과 푸근한 인상을 가진 선생님으로.
처음 만난 선생님은 새벽부터 계속된 진료에 몹시 지쳐보였지만, 힘껏 웃으며 나를 맞아주었다.
초음파는 조심스러웠고, 옷을 갈아입고 의자에 앉을 때까지 기다려줬다.
현실적이면서도 희망적인 태도로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적어도 선생님 때문에 상처 받을 일은 없을 것 같아 안심했다.
처음 인공수정 시술을 받았을 때는, 시술만 끝내고 가시는 게 아니라, 누워있는 나와 얼굴을 마주볼 수 있도록 침상 머리맡의 의자에 와 앉으시는 모습에 놀랐다. 마스크를 한 채였지만 나와 눈을 맞추고, 이미 알고 있는 다음 일정을 다시 한 번 차분히 설명해 주셨다. 긴장이 풀리지 않아 이불을 꼭 쥐고 있는 내 손등을 가볍게 톡톡 두드려줬을 때는, 주책맞게 눈물이 날 뻔 했다. 그리고 느꼈다. 나와 남편 다음으로 우리의 임신을 바라고 있는 사람이 선생님일지도 모르겠구나. 우리는 같은 배를 탔구나.
그리고 나는, 자꾸만 서로 부딪혀서 헷갈리는 주변의 조언들과 인터넷의 정보들 사이에서 헤매는 일을 그만두고, 무조건 선생님의 말만 믿기로 마음먹었다. 결과가 어떻든, 중심 없이 흔들리는 것보다는 분명한 기준점을 따르는 게 지금도 마음이 덜 힘들고 나중에도 후회가 적을 것 같다.
"시술하고 2주 후쯤 지방 갈 일정이 있는데 차로 오래 이동하는 게 문제되지 않을까요?"
"당일날 이동하셔도 됩니다."
"시술한 날도 일상적인 활동이나 집안일은 해도 되는 거죠?"
"토끼뜀을 뛰셔도 됩니다."
"실내자전거 타는 거 괜찮을까요?"
"뭐든 운동을 하는 편이 훨씬 좋습니다."
하라는 건 다 하고, 하지 말라는 건 안 하려고 했는데,
하면 안 된다는 건 거의 없고, 하라는 건 엽산과 운동, 단 두 가지 뿐이다.
선생님은 환자들이 수시로 질문할 수 있도록 인터넷 까페도 운영하고 있는데,
늦은 밤 시간만 아니면 질문을 올린지 한두시간 안에 답변을 달아준다.
족욕 하는 거 괜찮을까요, 커피 하루에 한 잔은 괜찮다고 하셨죠,
엄마가 술떡을 사오셨는데 먹어요 되나요까지.
온갖 사소해 보이는, 하지만 당사자는 너무나 진지한 마음으로 묻는 그 질문에,
도움이 된다는 증거는 없지만 해가 되지는 않겠습니다, 카페인은 하루 300mg 이하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간결하고 명확하게 대답해준다.
인공수정 1차, 2차에 실패하고는, 괜히 선생님에게 뾰루퉁한 얼굴을 보이기도 했다. 앞으로도 실패가 거듭된다면, 지금과 같은 신뢰는 흔들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가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는 파트너라는 마음은 잊지 않으려고 한다. 선생님과 우리 부부가 함께 노력한 끝에 '아이가 있는 가정'을 하나 더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한다면, 세상에 이렇게 귀한 인연도 드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로 <스카이캐슬>은 끝나지만, 한서진과 예서는 김주영쌤과의 레이스를 중도포기했지만, 우리 부부와 선생님의 레이스는 계속된다. 우리 부부에게도 언젠가 아이 교육 문제, 입시 문제로 머리 아파할 날이 올까? 아무리 힘들어도, 교육관이 달라 부부가 싸우더라도, 그런 날이 우리에게도 꼭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