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맑음 Jan 04. 2024

그리하여 사랑덩어리가 되어라.

마음 치유의 끝판왕_예수님

'사랑함'의 본보기를 인생으로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 ‘모세의 율법 중에 어느 것이 가장 크냐’는 꼬투리를 잡으러(왜냐하면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전하러 다니지는 않으셨다.) 온 유대인의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와 같이 네 형제를 사랑하라.”


누구나 자기 존재가 인정받고 대우받기를 원한다.
사랑의 '감수성'이라는 표현을 하기도 하는데,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로써 영원한 존재자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게끔 창조되었다. 마치 햇빛을 받고 뻗어가는 식물처럼, 본능이다. 이것을 모르니 자꾸 엄한 상대에게 그것을 보상받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계속해서 자기 마음과 존재를 인정받으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내 마음이 옳다고 자신이 맞다고 그 존재를 주변인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부모가 아이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지 않으니, 세대가 무지(無知) 속에 갇혀간다.


예수님이 태어난 2000년 전 이스라엘, 4천 년동안 유일신을 섬기던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아 예수님을 제대로 맞지 못했다. 오히려 반대하고 핍박하다가 처참하게 채찍질해서 그 시대의 가장 극형인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만들었다.

그래서 같이 옆에 십자가에 매달린 죄인 중 좌측 죄인이 이렇게 조롱한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너와 우리를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해 보라고...

가장 먼저 알아채고 섬겼어야 할 종교의 지도자들은  오히려 반대하고 핍박하였고, 가난하여 잃을 것이 없는 자들과 사회적, 종교적 계급이 낮아 힘없는 세리들, 인권마저 무시당했던 여인들과 어린아이들, 병든 자들이 많이 따랐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그 시대 최고의 복은 바로 그토록 조상 대대로 기다리던 하나님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맞이하며 그를 따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위험이 따랐다. 동방 박사들이 별을 보고 경배하러 찾아오니 당시 왕이었던 자는 ‘나 이외에 유대의 왕이 이외에 누구란 말이냐!' 하고 예언의 왕이 태어났다는 마을 나사렛 일대를 뒤져 동방박사들이 예언한 때를 기준으로 두 살 아래 어린아이들을 다 죽여 버렸다.


 왕이 하문했을 때 종교의 지도자들이 ‘우리가 조상 대대로 섬기는 신앙 세계의 왕’이라고 잘 얘기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그리해도 왕권시대의 왕이었으니 마음에 시기와 질투가 싹트면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예수님이 성장해서 공생애의 삶을 사실 때에도, 그 시대 종교 지도자들 역시 율법 안에 갇혀서 가장 극렬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예수님은 반대자들의 마음을 알아주고, 돌이키게 되기까지는 기다려 줄 시간이 없었다. 말씀을 전할수록 따르는 자들이 많아질수록 반대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쫓아다녔기 때문이다. 대화의 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미 그 마음에 비판과 시기와 질투, 멸시를 가득 품고, 눈을 세모로 뜨고 꼬투리를 잡으려고 쫓아다녔을 뿐이었다. 그리고 뒤에서 음모를 꾸몄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이들의 처사를 올리고 누가 옳고 그른지 따지기도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의 권세로 그 땅을 심판할 권세가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만왕의 왕이신 메시아의 자존심이 오죽했으랴~!!

(惡)한 자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가까이 따르는 자들에게는 그 비유를 풀어 주셨다. 그러다가 시대가 예수님을 미워하는 죄가 차올라 모든 판세가 ‘그들을 구원하러 온 자’가 그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우리는 육신의 세계가 근본인 영적인 세계의 판도에 따라 흘러감을 알아야 한다. 육으로는 잘 되는 것 같아도 영으로는 안 되는 길로 가는 경우가 많다. 잘됨과 안됨의 차이는 구원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판세를 뒤엎고자 즉 구원의 길을 여시 고자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의 길로 가신 것이다.


누구의 죄로 인함인가?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하는 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저 이스라엘의 한 종교 지도자라고.

그 시대에도 예수님이 자신의 죄로 죽었다고 말하며, 자칭 메시아라고 비웃기까지 했다.
예수님은 시대의 판국이 악으로 기울게 되니 요즘 말로 맞짱 뜨지 않으셨다. 기도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부르셨지만, 마지막에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야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구원과 사랑이 이루어 짐을 깨달으시고 영광되이 가셨다. 죄인 대신 죽어 죗값을 치르시고 영적인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순간까지도 하나님 앞에 이렇게 중보 하셨다.
저들이 몰라서 그런 것이니 용서해 달라고.
예수님의 죽음은 사랑과 희생 그리고 구원의 죽음이었다.


하나님이 부모님 입장이라고 생각해 보자.

두 형제가 있는데 동생이 좀 잘났다. 무얼 해도 성공하고 사람들이 따른다. 부모님도 그를 사랑한다. 그런 동생이 미워 시기 질투하여 싸움이 났다. 형은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언성을 높이며 자신이 잘했다고 저 놈이 잘 못한 거라고 주장한다. 집을 나가겠다고 한다.


그럼 인성이 제대로 된 동생이 뭐라고 하겠는가?

내가 잘 못했으니 나가지 말라고 부모님 밑에서 화목하게 잘 살아보자고 하지 않겠는가?


맞다. 가인과 아벨을 각색해서 예를 들었다.


그런 거다. 죄가 가득 차면, 반드시 해결해야 된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누군가 대신

그 값을 치러줘야만 되는 것이다.

희생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근본 되시는 존재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거다.

이렇듯, 나라의 왕과 종교의 지도자들의 배척 속에  예수님은 누가 뭐라고 하든, 오직 하나님의 말씀 그 시대에 알고 깨닫고 행해야 할 진리만을 전하기 위해, 온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메시아의 사명을 하시고 가셨다.

인류를 위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예수님이 설법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그와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그 시대 예수님을 맞고 섬겼어야 할 제사장들과 서기장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종교인들, 알지 못하는 자들, 따르는 제자들의 부족함까지도 끝까지 참아주고 악한 자들의 죗값을 대신 받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무지와 살인적인 마음이 그렇게도 무섭다.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고 그르치게까지 되기 때문이다.

그의 사명이 메시아 즉, 하나님 앞에 인류의 구원의 문이 되시기에  그 시대 이스라엘만 혜택을 받은 것이 아니고, '온 인류'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그 시대 종교인 역시 시기와 질투와 명예 욕과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자신이 맞아야 할 상대를 알아보지 못하고,

간판도 배경도 없는 시골 청년이 많은 기적을 일으키고 무리가 그를 따르니 그토록 미워하고 증오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말씀 앞에는 꼼짝을 못 하니 자꾸 때 지난 모세의 율법을 들어 지적질을 해댔다.

왜 주일에 일을 하느냐? 왜 여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먹느냐? 등의 이런 수준의 비방이었다.



쓰레기를 한번 버리면 누가 치울 때까지는 없어지지 않듯이, 죄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대신 그 값을 치르지 않으면 없어지지 않는다.

이는 보이는 세계에서도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물질의 세계도 이치가 맞아떨어져야 그에 맞는 결과가 이루어지듯이,

보이지 않는 차원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즉,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세계에서도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 그것을 종교적인 언어로 하면 '회개'이다.



그러하니 나는 심리학자나 상담가 아닌 일반인이자 종교인으로서 '진정 마음의 자유함'을 얻으려거든,

하나님의 생각(말씀)을 받아야 된다고 말하고 싶다.(개인이 하나님을 대면한다고 하더라고, 구원의 사명자이신 메시아 예수님 급의 말씀을 받을 수는 없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이다.)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바로 거기가 탈출구라고 주장하고 싶다.

물론 심리학자들도 이 부분을 언급하긴 했다. 자신의 감정을 인정해 주고 자기 자신을 충분히 위로해 주면 스스로 벗어나게 된다고.


그러나 주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없기에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싶다.
이 시대의 지식, 학문, 기술, 과학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을 빼고 말하니 90% 이룬 것도 0%가 되어 버리고 말 때가 아주 많다.

'그래~, 내가 그동안 내 마음을 너무 소홀히 했구나~!' 하고, 자기 자신의 마음을 치유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자기감정에 집중하다 보면 자기 우물에 갇히게 될 때가 있다.
나의 경험이 그렇다. 그리고 누구나 그런 경험이 적게든 크게든 있을 것이다. 방향을 잘 잡아야 된다.
  왜냐하면 인생은 하나님의 때와 맞물려 있기에, 내 감정에 빠져 정체될수록 앞으로 나가가지 못하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게 된다.

  그동안 자신이 환경이 불우해서 가족이나 친구나 동료의 위로와 인정을 받지 못했을지라도, 나 자신의 마음을 위로할 줄 모르고 자랐을지라도, 하나님은 인류 모두에게 각각 1: 1로 이런 생각의 축복을 주시고 새롭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무수히도 주셨다. 일인당 수천번씩이다. 그리고 지금도 역사하고 계신다.

  이를 확실하게 알고 싶으면 기도해 보라고, 적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지난날을 돌이켜 찾아보길 바란다.


  자신이 한 일 같을지라도 생각의 축복을 받지 않았으면 하지 못할 일들이 무수히 많았다는 것을... 때로는 그것을 이루기까지 용기가 필요하고 좌절하기도 했을 것이다. 어떤 자는 의지가 강해서 생각의 축복을 받아, 더 많이 행해 기필코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얻은 것이 없어도, 이룬 것이 없어도, 하나님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 끝까지 함께 하시니 힘을 내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한걸음 내딛기를 바란다.

나 자신을 위한 회개도 하고, 자신에게 상처를 준 자를 위해서도 회개해라. 특히나 가족이라면 누군가 대신 회개하고 그 죄가 청산되어 해결된다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당신이 누군가로 인해 마음이 아팠다면, 그건 기회이다. 누군가의 작은 죄하나라도 대신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위대한 일인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심정을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그 생각이 일체 되어 메시아로서 이웃을, 즉 인류를 사랑하는 조건을 완벽히 세우셨다. 피눈물 나게 기도하시고, 아... 더 이상 할 수 없는 단계로 세우셨다.


우리에게는 메시아가 필요하다. 메시아가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와 조건을 가지고 있어서는 나중이다.

메시아의 말씀과 사랑이 필요하다.
  인생을 살아갈 수많은 지혜가 있지만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 자신을 사랑덩어리로 만드는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존재자가 되도록 자신을 만드는 말씀이 필요한 것이다.


P.S 2021년 어느 봄 날. 내 마음이 너무 힘들어 심리학 책을 읽다가 도저히 답이 안나와서 쓴 글...


매거진의 이전글 00가 말했다(우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