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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 Jan 07. 2022

사라진 고양이들 그리고 코알라

어렸을 적 읽었던 한국 전래동화에 많이 나오는 내용 중에 하나가 동물이나 곤충 등의 미물을 살려주고 그 존재가 나중에 주인공의 생명을 지켜주거나 복이나 재물을 주는 보은의 이야기이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복을 받기 위한 목적이 아닌 순수한 마음으로 생명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민족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는 순수하게 길고양이들에게 호의를 베풀기가 조심스럽다. 먹이와 거처의 문제로 아직 많은 민원과 다툼이 있다는 것을 안다.


누군가에게는 사랑스러운 존재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더럽고 시끄럽고 때론 교미 소리 때문에 망측하고 기피하고픈 동물이다.


나 역시도 성을 터부시 하던 세대에 자라서 그렇게 생각했고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불편하고 (역시 이상하게 풀어서 얘기하니) 불쾌했던 것 같다.


그런데 동물을 처음으로 가까이서 직접 대하고서는 그런 안 좋은 인식관이 사라지고, 동물의 생존과 번식 본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문제는 본능을 제어하지 못하는 인간이고, 동물에게 인간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생각되었다.


오히려 성에 대한 나의 인식관이 더 건강해진 것 같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들 사이로 너와 나의 소유가 정확하게 나누어진 오늘날. 수많은 길고양이가 인간을 경계하면서도 아슬아슬 그 틈을 오가며  오늘도 먹이를 위해 거처를 위해 아주 멀리는 떠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동물권'이라는 표현도 이제는 낯설지 않고 상식처럼 스며든 단어가 되었지만, 여전히 반기지 않고 눈살을 찌푸리며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을 안다.


극적인 예로 호주의 길(들) 고양이 살처분 이야기를 하지만,  너무나 안타까운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말린 캥거루 고기에 고양이에게만 작용하는 독성을 지닌 성분을 첨가해 수년에 걸쳐 헬기로 살포했다.


다른 군의 동물들에게 해가 되니 내린 결정이라고 하지만, 2019년 호주 대형 산불로 인해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동물인 코알라가 극심한 피해를 본 것을 보면 인간이 인위적으로 살상을 하며 개체수를 조절한 것에 대한 노력이 무색해진다. 


유칼립투스를 먹고 취한 코알라가 불을 피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고통과 독을 먹고 죽어가는 고양이의 고통을 비교할 수 있을까?

생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는데, 죽이는 방법이 최선이었나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죽어버린 고양이들을 놓고 안타까워하는 자도 기억하는 자도 없다.

생명의 존엄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나의 고양이가 아닌 고양이는 이름도 없이 사연도 없이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누구에겐가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기를 수많은 시인과 가수들이 노래하지만 영원히 존재하시는 자, 하나님에게 의미를 부여받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에게 의미 있는 이름이 되고 싶다.

당신도 그러하지 않은가요?
어느 겨울날 차에 마주앉아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는 나와 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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