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육아에 진심이었던 나날들, 하지만…
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비상인 나날이었다. 주변 영유아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들었다. 소아과 선생님, 유아교육학 박사, 어린이집 원장님, 언어치료 선생님 등 몇 안 되는 인맥을 총 동원해 아이의 상황을 설명했고 그들의 의견에 귀 기울였다.
그 결과 키워드는 2개로 함축되었다. ‘또래와의 경험’, ‘놀이치료’.
모두 돈과 노력이 드는 행위이다. 퇴근 후 아이를 센터에 데리고 가고, 센터에서 아이가 노는 것을 보고 피드백을 받고, 그 결과를 나에게 적용하는 일 등 센터에 다니는 일도 만만하지 않다. 지금도 벅찬데 하나 더 치료를 더하는 것도 용기와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물론 치료비도.
어린이집에 아이의 현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참관수업을 요청했다. 아이가 있는 곳은 직장어린이집이라 참관수업이 없다. 어린이집 특성상 방학도 없고, 행사도 많이 없다. 그래서 부모들의 호흥도는 좋은데 아이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일하는 부모님을 위한 포커싱이 맞춰져 있는 곳, 직장 어린이집에 우리 아이들 둘은 다니고 있다.
참관수업을 위해 아이를 데려다 놓고 밖에서 잠시 어슬렁거리다 몰래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가 잠시 다른 것에 집중하는 사이 선생님과 나는 007 작전처럼 빠르고 조용히 옆 교실로 향했다. 창문을 통해 아이를 지켜봤다. 중간중간 눈치가 빠른 아이들이 나를 보러 왔고, 냉정히 조용히 해달라는 사인을 보냈다. 우리 아이가 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평소 같은 양상을 보이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다.
“ㅇㅇ야, 우리 같이 놀자~”
선생님은 중간중간 목이 터져라 우리 아이의 놀이 참여를 유도했다. 창 밖으로 선생님의 하이톤 목소리가 몇 번이나 새어 나왔다. 선생님은 정말 최선을 다해 아이를 참여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이는 울기 일보 직전이었고, 시무룩해했다. 놀이 양상은 몇몇 목소리가 크고 빠른 아이들 위주로 돌아갔다. 늦된 생일에 빠르지 않은 아이, 빠른 아이들 사이에서 치이는 아이. 그게 바로 우리 아이였다.
교실을 배회하다 아이가 책상에 홀로 앉았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다가와 물었다.
“ㅇㅇ야, 뭐 그리는 거야?”
“엄마“
“엄마 그려?”
“엄마 보고 싶어요, 엄마 언제 퇴근해요? (당시 시각 오전 10시 30분)”
나는 이 말을 듣고 눈물을 쏟고 말았다. 남편의 눈시울도 붉게 물들었다. 치이는 줄 알았지만 이렇게 치일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아이는 어린이집에 있는 시간을 고되고 힘들게 견디고 있었던 거다. 너무나도 힘들게.
그런데 화이트보드에 그린 내 얼굴이…
그래, 아직 세 살이니까… 눈물이 들어갔다.
나는 연년생 아이 둘을 키우고 있다. 아이들의 나이는 각각 3세, 1세이다. 월생 차이는 19개월로, 첫째가 돌이 채 되기도 전에 둘째를 임신해 연년생으로 아이를 키우고 있다.
아이들은 하루 100번 웃고, 200번 싸운다. 그나마 둘째가 말을 못 해서 지금은 서로 소리 지르며 싸우지 않지만 앞으로 얼마나 많이 싸울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임신을 해서도, 애를 낳아서도 모성애가 생기지 않아 스스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모성애란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인가 싶었다. 육아의 최종 목적은 독립이라고 스스로 외치며 다녔다. 심지어 태명도 ‘씩씩이’였다. 어디서든 씩씩하게 살면 먹고는 살 수 있겠다는 나의 바람이었다. 나는 아이가 씩씩하게 자라 내 곁을 떠나길 바랐다. 남들보다 1년 일찍 독립하고 싶어서 그랬을까? 아이는 12월 말에 태어났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어느 날에.
아이가 나오기 전에 이슬이 비치는데, 이슬을 보니 마음이 이상했다. 그래, 이게 네 운명인가 봐. 별생각 없이 얘기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나의 무지였다. 무심함이었다. 모든 건 나의 잘못이었다.
아이를 낳고 퇴원해 보니 1월 1일이 되어 있었다. 왠지 모를 억울함에 눈물이 났다. 본래 1월생을 계획했는데 12월 말, 그것도 극극 연말생이 되어버린 것이다. 억울함이 밀려왔다.
나도 12월 생이면서
이후 나는 ‘모성애‘라고 부르기엔 거창하고 ’ 책임감‘이라고 부르기엔 강도 높은 모유수유 기간을 거쳐 최선을 다해 아이를 키우기 시작했다. 아는 것이 없으니 책에 의존했다. 책에는 아이를 느리게 키우라고 쓰여 있었다. 자연이 가장 좋다고들 했다. 그래서 종종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바람을 느끼게 했고 비와 눈을 만지게 했다. 어린이집은 보내지 않았다. 아이가 아픈 게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가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이 느렸다. 소아과에 가 보니 어린이집에 가는 게 말을 하는 것과 꼭 연관성이 있다고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책에 나와있는 대로 아이를 길렀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또 자연스럽게.
그러다 대기명단에 올려놓았던 직장 어린이집에서 순서가 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고민을 했다. 직장이 위치한 곳과, 내가 사는 곳이 달랐다. 집 근처 어린이집을 보내는 게 최선이었는데 직장 어린이집을 한 번 가보고 나니 눈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구를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부동산은 하락장이었다. 근처 부동산에 리스트를 쫙 뿌리고, 부동산 소장님들께 사정사정했고, 매수자 할머니께 ‘새댁 복 받으시라’는 인사를 몇 번이나 받고 겨우 집을 매도했다. 다른 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직장어린이집을 가면 내가 원하는 그림이 나올 거라 생각했다. 나는 집을 겨우 팔고 삶의 터전을 옮겨버렸다. 단지 우리 아이의 어린이집을 위해서. 그리고 복직을 했고 꾸역꾸역 살아가는 와중 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온 거다.
늦된 아이, 적응하는 데 오래 걸리는 아이가 우리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힘들어하고 있다. 아이는 내가 출근하고 맡아줄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어린이집에 들어가서 하루 종일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선생님의 말씀이 그랬다. ㅇㅇ는 어린이집에서 하루 종일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고. 밥 먹기 전에 한 번, 낮잠 자기 전에 두 번, 낮잠 자고 나서 세 번 엄마를 찾는다고. 이 말을 전하는 선생님도, 이 말을 전해 들은 나도 울고 말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까. 친구 없이 혼자서 몇 시간을 견디는 게 얼마나 힘든지 다들 아니까. 그것도 3살짜리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의 딸이 하루 8시간의 시간을 견디어내고 있다.
꾸역꾸역 힘들게.
언젠간 아이가 적응할 거라 믿는다. 적응해야만 한다. 어쩔 수 없이 팔아야만 했던 그 집은 시기가 지나니 7천만 원이 플러스된 상태에서 거래가 되기 시작했다. 처음 몇 번 보다가 이젠 안 본다. 보기만 하면 속상하기만 하니까. 내가 못 먹은 만큼 할머니에게 기쁨이 될 거라 생각하고 말기로 했다.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저런 날도 있기 마련이다. 그게 지금이었을 뿐.
공교롭게도 저번 주에 동료들과 밥을 먹는데 어떤 동료가 내게 물었다.
“워킹맘인데 한 번도 그만두겠다는 얘기를 안 해서 신기해요”
“나중엔 다니고 싶어도 못 다닐 때가 다가올 텐데요. 애 키우다 보니 별별 일이 다 있잖아요”
그리고 생각보다 그 시기가 빨리 오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이가 너무 어릴 때 복직을 했나 보다. 하지만 나는 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쓸 수 있는 휴직과 쓸 수 없는 휴직을 다 당겨서 썼기 때문이다. 내가 쓸 수 있는 휴직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눈치도 보이고, 눈치가 보이고, 눈치 보이고, 눈치눈치눈치….
이제 며칠 후면 월요일인데 그래도 5일만 지나면 토요일인데 아이는 매일 내게 묻는다.
“엄마, 내일은 토요일이야? 어린이집 안 가는 날이야?”
월요일에도 화요일에도 수요일에도, 내일은 토요일이냐고 묻는 우리 아이.
생각보다 당겨지고 있다. 나의 퇴사 시기가. 하지만 나는 버틸 수 있는 데 까지 버틸 것이다, 다닐 것이다. 다니고 싶다.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 봐야지. 하지만 벌써부터 피곤 해지는 건 왜일까. 아이는 안쓰럽고, 월급통장은 스치고, 이직할 자신은 없고, 이직하고 싶지도 않고,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내야지. 스스로를 토닥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