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 중인 한 단톡방에서는 수다를 떨다 갑자기 텍스트로 각자의 드립력을 뽐내는 상황이 발생하곤 했다. N행시 배틀이 자주 있었는데, 유일한 인문대생이었던 나는 어휘력과 문장력에서 자부심이 있었지만 N행시 배틀에서는 항상 위축됐다. 운을 맞춘 구절은 몇 개고 만들어 낼 수 있는데 만들어내는 것들이 도무지 재밌지가 않았다. 기계처럼 뽑아내도 공산품처럼 특색이 없었다. 반면 친구들이 하나씩 던지는 N행시를 보면 맞춤법도 지키지 않는데 하나같이 허를 찌르는 위트가 있어서 실제 웃음이 나오곤 했다. 진심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받으며 그 때 생각했다. 내가 말을 전공으로 했던 게 창의적인 글을 쓰는 데 도움은 되지 않는구나.
소위 ‘글 쓰는 사람’은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한없이 자유롭게 사고하며 기존 질서에 반하는 태도를 가져야만 진정한 글쟁이가 될 수 있다는 생각. 6쪽
나는 고작 친구들과 N행시를 겨루며 그런 생각을 했지만 저자는 정말 모범생이다. 서울대생이면서 1학년 때는 올 A+맞아 동기들 사이에서 학점의 여왕이라는 별명까지 생겼던. 학부시절의 강의 노트만으로 20년 전의 대학생활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낼 수 있으려면 그 강의노트엔 무엇이 담겨 있어야 하려나. 강의노트에뿐만 아니라 저자의 기억도 휘발되지 않고 어디엔가 잠들고 있었던 거겠지. 저자가 학교 생활을 어떻게 했을지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비슷한 경험도 나는 한 적이 없으니.
‘모범생인 저자가 대학교를 다니며 적었던 강의 노트를 소개하며 대학시절의 공부가 지금의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소개하는 책’이라는 사적인서점 지수님의 설명에 이 책을 데려올 생각을 했던 것은 나도 지금 나의 사회생활이 대학교에서의 경험에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지금 내 커리어의 원천이 되어 주는 IT분야의 지식은 전공 공부로 쌓은 것이 아니되, 직장생활의 원천이 되어 주는 소통력과 사회성은 문학으로 다양한 인간군상을 간접경험하고, 각종 과제로 내 생각을 논리정연하게 타인에게 전달해 보며 쌓을 수 있었다. 나에겐 그 시절의 강의노트가 남아있지 않고, 학교에서 어떤 지식을 배웠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내가 자기계발과 자기반성을 거듭하며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노력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으로 그 시절의 유의미를 확신할 수 있다.
대학 시절의 공부는 잊히는 과정에서 정신에 깊은 자국을 남기고 거기에서 졸업 후 이어질 고단한 밥벌이의 나날에 자그마한 위로가 될 싹이 움튼다. 그것이 공부의 진정한 쓸모라고 생각한다. 9쪽
서울대니까, 서울대생이니까 가능한 수업과 학습이라는 생각을 애써 해보지만 나에게도 비슷한 기회가 분명 있었고 그 기회를 소홀히 여겼다는 사실이 책을 읽는 내내 따갑게 느껴졌다. 상황에 임하는 태도의 차이가 미래의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꼈다.
대학 1학년 때의 글을 다시 읽으며 너무나도 솔직한 무지의 고백에 실소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류시화 시집 제목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는 몰랐기 때문에 나는 무서운 속도로 대학을, 새로운 것들을 빨아들였다. 22쪽
저자는 대학 교육의 유의미를 ‘교양’이라는 단어로 설명하는데, 나는 대학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소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곤 했다. ‘교양’이 정신세계에 깊이를 더해줄 지식의 저변을 의미한다면 ‘소양’은 현실세계에 적응하기 위한 실용적인 기술의 저변을 의미한다. 이는 내가 지식을 탐구해야 하는 대학생활 그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고 사회인이 되기 위한 기술들을 얻는 데 급급했다는 반증일 수 있겠지만, 그 방면에서 확실히 대학에서 습득한 유용한 것들이 많았다. 특히 나에게만 통용되는 논리가 아닌 공감각적인 논리로 서로의 공통감각을 탐색하며 상대방의 마음의 벽을 낮추며 대화하는 법이나 나의 생각이 읽는 이로 하여금 상상이 되는 방식으로 말과 글의 소통을 하고자 하는 태도는 나의 사회생활, 인간관계에 큰 도움이 되었다.
머릿속에 어슴푸레 남아 있던 '교양으로서의 판교가 그렇게 20년 만에 비로소 명징해졌다. '교양(culture)'이란 원래 경작(耕作)을 뜻하는 것이니, 수년 전 뿌린 씨앗의 결실을 이제야 거두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교양서로 유명한 일본 출판사 '이와나미쇼텐'의 로고는 밀레의 그림 「씨 뿌리는 사람』인데, 창립자 이와나미 시게오가 스스로를 '씨 뿌리는 사람'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62쪽
저자는 자신과 먼 분야라 생각했어도 학우들의 추천에 용기를 내어 여러 교양 과목을 수강했고, 그 수업들은 저자의 교양이 되어 저자가 사회인이 되었을 때 의외의 분야에서 지식을 뽐내게 해주는 자양분이 되어줬다. 기획자라는 직업 특성 상 내게도 얕더라도 넓은 지식이 필요한데 지금이라도 교양 쌓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지금의 노력이 미래의 나를 구해주기를 바라며 깊은 독서로 올해를 보내고 싶다. 이 매거진의 제목을 ‘소생흔’으로 정한 것은 독서와 사색으로 영혼의 회복을 꾀하려 하지만 그 과정이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자기암시다. 그 과정에서 분명한 흔적을 남겨 먼 훗날의 내가 지금의 노력을 헤아려 주길 바라서다. 그 흔적은 결코 봄직하지 못할 것이지만 나의 비루함을 생각만 하기 보다는 표현하는 것이 백번 나을 것이라 믿는다.
실망하게 될지라도,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던 세계를 현실에서 확인하는 일은 중요하다. 얇은 그런 과정을 통해 구체화된다. 실재하는 금각을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에, 나는 금각 꼭대기의 봉황이 극락정도를 상징하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봉황이 서쪽을 꿈꾸는 것은 금을 지은 이가 죽은 후 아미타불이 다스리는 서방 정도의 세계에 도달하기를 염원했기 때문일 거라고 짐작해 보는데, 이는 '일본미술사' 수업을 들은 덕이다. 2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