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 이야기가 있는 서사를 좋아한다. 나를 새로운 세계로 데려가 읽지 않았으면 없었을 경험을 시켜준 주인공에게 작별 인사를 받는 일이 항상 아쉬웠다. 그 뒤로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근황토크를 좋아하고 어릴 적 재밌게 봤던 프로그램 등장인물들의 근황을 검색해 확인하곤 한다. 다만 그 뒷이야기가 언제나 훈훈하지만은 않을 것이고. 나는 지금도 『나루토』의 후일담으로서 『보루토』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중급 한국어』는 사적인서점의 1월 처방책이자 함께 배송받은 『초급 한국어』의 후일담이다. 오토픽션, 자전적 소설이라 배우기도 한 이 장르는 저자에게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흥미로워할 만한 장르지만 이 소설로 저자를 처음 알게 된 나에겐 그저 읽을 맛이 나는 재밌는 소설이었다. 소설적인 세계관, 갈등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수업에서 사용했을 강의록은 예전 국문과 수업을 들었을 때의 기억을 되살리며 반가움과 그때 가졌던 글에 대한 열정을 떠올리게 했다. 주인공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와 그 변화에 임하는 주인공의 방식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일상적이어서 감정이입이 됐다.
글쓰기 강의를 들을 때면 언제나 가슴 속 담아뒀던 욕망이 자극받는 느낌이다. 사실 태도에 대한 강의는 무엇이든 그렇다. 기술은 듣고 나서 연마해야 내 것이 되지만 태도는 내가 선택하기만 하면 취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수업을 듣는 동안 이미 내가 변한 것만 같아서, 즉각적인 효능감을 느낄 수 있어서 태도의 대한 강의는 언제나 듣기 좋고 쉽게 받아들여진다.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나면 여러분은 문지방을 넘어 다시 일상의 공간으로 돌아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빈손이라고요? 아닙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약이 여러분의 두 손에 쥐어져 있어요. 쓰기 전의 나와 쓴 다음의 나는 결코 같지 않습니다. 말했잖아요? 우리는 A에서 A'가 되었으니까요. 47쪽
『초급 한국어』에서 이민 작가를 꿈꾸며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던 청년 문지혁은 예술가로서 본인이 가진 ‘반듯함’이라는 콤플렉스에 대해 생각한다. 『공부의 위로』의 서두에서 저자가 밝기히도 했던, 예술을 흠모하지만 예술적인 기질을 갖지 못한 사람의 열등감. 소설 치고는 극적인 재미가 없던 소설을 왜 이렇게 멈춤 없이 읽게 됐나 생각해 보면 주인공에게 느낀 동질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럼 앞으로 비뚤어지겠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선생님들도 웃었다. 두 사람만 웃지 않고 있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머리끝까지 벌겋게 달아올랐음이 분명한 나와, 그 소설가 선생님. 웃음이 잦아들자 그녀는 정색하며 말했다. "지혁 씨가 그렇게 대답하면 안 되죠." 소설가는 덧붙였다. "반듯한 게 어때서요.”라고 해야지. 『초급 한국어』 149쪽
비뚤어지지도, 그렇다고 제대로 반듯해지지도 못한 사람의 정서적 말로일까, 한국에 돌아와 결혼을 하고 5살 난 아이의 아빠가 된 문지혁은『중급 한국어』에서 ‘애매함’에 대해 생각한다.
애매하다는 말은 비뇨기과에서만 들은 게 아니었다. 그때 까지 나는 두 권의 책을 냈는데, 책을 낼 때마다 ‘애매하다’는 평을 들었고 나에게 애매하다는 말은 그 자체로 애매하게 들렸다.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애매하다는 건 대체 뭘까? 답답한 마음에 사전을 찾아보기도 했다. 24쪽
문지혁은 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면서도 작가로서 본인의 애매함을 콤플렉스로 여긴다. 책을 내긴 했지만 등단한 것은 아닌, 두 권이나 내긴 했지만 호평받지는 못한. 언젠가 이센스가 쇼미더머니에서 광탈한 게 인생 최대 업적인 래퍼들이 돈을 받고 일반인들에게 랩을 가르치는 현실을 인스타그램에서 비판한 적이 있다. 회사 퍼블리싱팀의 팀장인 J 대리님에게 ‘대리님 커리어의 최종 형태가 무엇일 수 있냐’ 물었을 때에도 대리님은 ‘잘 풀리면 창업, 잘 안 풀리면 강사’라고 하셨다. 업계 지망생들의 능력을 길러주는 일이 업계에서 멀어진 사람이 택할 수 있는 선택이라니. 그런 선생들은 업계의 중심에서 활약하는 자기자신을 상상하는 학생들의 반짝이는 눈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그때 왜 난 아뇨, 그럴 수 없습니다, 라고 답하지 못했을까? 글을 써서 먹고살려고 하는 건 미친 생각이에요. 라고 정확히 대답해 주지 못했을까? 아니, 아니, 왜 처음부터 나에게 이 길로 들어오지 말라고 누군가 말리지 않았을까? 자기들은 다 알고 있었으면서? 『초급 한국어』 142쪽
어느덧 두 명의 후임을 둔 내 모습을 겹쳐 본다. 신입 시절 후임이나 동기 없이 홀로 기획, PM일을 할 때에도 ‘웹 기획자가 하는 많은 일 중 기획을 제일 못하는 기획자’라며 자책해 왔고 ‘기획을 제일 못하는 기획자’라는 콤플렉스가 아직까지도 내 직업을 떳떳하게 소개하지 못하는 족쇄가 된다. 내 또래의 다른 팀 선임들은 후임들이 작업 중 문제를 겪을 때 본인이 가진 노하우와 경험으로 막힌 혈을 정확히 뚫어주는데 나는 후임에게 ‘잘 되고 있어요?’라고 물으면 나에게 토로하는 고충을 간단히 해결해 주지 못 할 게 무서워 잘 되고 있냐는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곤 생각한다. ‘옛날 툭하면 회사에서 밤새고 불안장애 약을 먹으며 손목에 상처 내는 일로 스트레스 풀던 때가 차라리 독기 가득하고 날이 서 있어서 일은 잘됐어. 그때로 돌아가야 하나?(다시 나를 학대해야 하나?)’
『중급 한국어』에는 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치는 저자의 실제 강의 내용일 것 같은 생생한 강의록이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그 강의 내용이 주인공의 일상과 묘하게 겹치는 대목에서 웃음을 자아낸다. 마침표 외의 문장부호를 삼가며 특히 물결표를 절대 쓰지 말라는 강의 내용 뒤로 딸아이가 주인공의 키보드를 신나게 두들기며 물결표로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 특히 그랬다. 자녀란 부모가 지금까지 쌓아 온 세계관을 너무나도 쉽게 전복하는 존재라는 은유 같았다.
한국에 돌아오기 전 돌아가신 어머니를 주인공은 여러 상황에서 여러 장면으로 반추한다. 부모가 되었기 때문에 더 그렇겠지. 꼭 부모가 되지 않았어도 나 역시 나의 부모를 문득문득 떠올리게 되는 나이다. 이 책을 읽고는 더욱 그랬는데, 동네 카페에서 책을 다 읽으니 어머니가 출근하실 시간이 된 걸 보고 카페를 나와 집으로 향했다. 동선이 겹치니 엄마를 만나면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줘야지 싶었는데, 집 앞에서 나오시는 어머니를 세워 RAW 모드로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예쁘게 보정하고 싶어서.
『초급 한국어』와 『중급 한국어』의 첫 장엔 근사한 헌사가 있다. 전자에는 “나의 모국어, 어머니께”라는 헌사가, 후자에는 “나의 첫 외국어, 채윤에게”라는 헌사가 있다. 평생을 함께할 반려를 두지 않더라도 평생에 걸쳐 새로운 언어를 접하고자 하는 태도는 잃지 말자고 생각했다. 적어도 육체보다는 느린 속도로 노쇠해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