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책처방 상담에선 대표님께 회사에 더 이상 기대하는 것이 없어진 느낌과 내가 계속 소모되기만 하는 느낌에 대해 토로했다. 처음엔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 헌신이라 생각했는데 결국 나도 대가를 바란 거였고 대가 없는 헌신에 지쳐서 마음이 식은 것’이라 생각했지만 순서가 바뀌었다. 마음이 식어서 헌신할 마음이 더이상 들지 않는 것이었다. 대표님께서 그런 내 마음 상태를 ‘무망감에 가득 찬 상태’라고 진단해 주셨다. 그리고 이 책을 보내 주셨다. 제목에서부터 빈정이 상했다. 보답을 바라지 말고 선물을 주라는 메시지가 제목에서부터 느껴져서. 그런 책이기만 했으면 당연히 대표님께서 보내지 않으셨을 것이기에 마음의 벽을 하나 쌓고 읽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읽어보는 사상서라 반갑고 흥미로웠다. 보통 사상서는 관념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아주 정밀한 단계를 밟으며 메시지를 심화하는데, 그 과정에 사용되는 어휘나 논리가 너무 어려워서 길을 잃기가 일쑤인 반면 이 책은 친절하다 느낄 정도로 논리의 흐름이 부드러웠다. 각 장을 요약하는 것만으로 흐름을 따라갈 수 있었는데, 다만 몇 군데에서 논리의 비약이 심하게 느껴져서 이 책이 철학 논문으로 나왔다면 많은 비판을 받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소설, 에세이만 읽던 요즘 읽기에 굉장히 신선한 장르여서 집중해서 읽은 것은 분명하다.
저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을 타인에게 건네는 행위를 ‘증여’로 정의하며 이 증여가 차가운 자본주의 체제의 빈틈을 메울 수 있는 중요한 가치임을 설명한다. 하지만 이 증여의 특성을 설명하는 여러 대목에서 여러번 긁혀야 했다. 저자는 증여하는 행위는 증여받은 자만, 증여받았다고 자각한 사람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증여받았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하는 증여 행위엔 흐름을 만들어 내는 힘이 부족하다고 주장하며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라는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하는데, 주인공이 트레버가 증여받았다는 부채의식 없이 증여를 시작하는 바람에 흐름을 만들어내는 에너지가 부족해 자신의 목숨을 잃어야 했다는 대목에선 눈을 의심했다. 증여받았다는 부채의식 없이 증여를 했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었다니. 그 영화를 본 적은 없지만 소개된 줄거리 대로라면 트레버가 죽은 것은 이야기 안에서 그가 불러일으킨 증여의 흐름을 폭발시키기 위해 작가가 선택한 서사적 사건이지 논리적 필연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면서 증여는 보답을 계산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계산 가능한 증여는 ‘위선’이고 그런 행위는 행위자를 피폐하게 만들 뿐이라며 증여란 본인이 증여받았다는 부채의식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주장하는데, 그 주장을 하기 위해 드는 예시나 논거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증여받았다는 부채의식이 있어야 하는 이유가 우리가 성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 없이는 증여의 흐름에 동참할 동기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면서 성인이 아니기 때문에 보답을 바라고서라도 할 수 있는 선행을 위선이라 평가 절하하다니. ‘성인이 아닌 우리가 당신이 말하는 증여는 할 수 있고?’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아예 틀린 말을 하진 않았다. 보답을 바라고 하는 증여는 증여가 아닌 교환이며, 교환으로서의 선행엔 지속가능성이 없고 행위자를 결국 피폐하게 한다는 주장에는 공감했다. 내가 그런 상황이니까. 내가 회사에서 했던 모든 솔선수범엔 보상으로서의 호감을 염두에 두고 한 행동들이었으니 증여가 아닌 교환으로서의 행동이었다. 하지만 내가 회사에 가진 애착이 유지되었으면 그 선행 역시 유지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위선이라 해도 내가 그곳에 있는 한 지속되었다면 충분히 유의미한 행동 아니었을까? 내가 떠난다면 존재할 수 없는 건 증여 역시 마찬가지니까. 내가 떠나도 증여의 흐름은 그곳에 남을 것이라고 저자는 반박했을 것 같은데, 그건 교환도 마찬가지다. 나의 행동을 보고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다 생각해 이어서 할 가능성이 있다. 다만 내가 증여하는 태도로 생활에 임했다면 떠나게 된 지금에도 ‘남긴 것이 있다’는 만족감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납득은 된다.
책의 제목과 서두까지의 주장을 보고 고리타분한 자기계발서인가 생각했는데, 이 책은 사실 철학서적이었다. 증여라는 개념을 소개한 저자는 모든 것을 교환의 논리로 해석하고 가능한 모든 것을 상품화하려는 성질을 가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이 증여의 논리가 자본주의의 빈틈을 메우고 문명의 위태로움을 감추고 유지시키는 보완재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 자본주의 체제를 긍정하더라도 그 대안, 또는 보완책을 논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존중받아야 한다. 자본주의의 논리는 일견 완벽해 보이더라도 거기엔 각 개인이 체제의 교체되기 쉬운 부품으로서 간주된다는 무서운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부품으로서 우리가 영원히 체제 안에서 작동할 지언정 나 자신은 언젠가 철저히 소진되는 것이다.
교환의 논리가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 단위인 가정에까지 적용되었을 때 구성원들에 어떤 저주가 걸리는지도 설명한다. 증여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강요된 선의는 받은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구속하는 저주가 되며, 그 저주는 확실히 생명력을 앗아간다. 가정에 걸린 이 저주가 무서운 이유는 우리가 불합리한 것을 무시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어도 그 저주를 거는 사람이 가족이라면 그 저주로부터 도망칠 수 없으며 모든 움직임이 봉쇄된 채 생명력을 빼앗기기만 하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저자는 증여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을 조명하며, 반대로 증여가 어떤 모습으로 출현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증여엔 전사가 있어야 한다.(증여는 사명감으로 ‘하게 되는’ 것.) 증여는 합리적이어서는 안 된다. (이게 왜 나에게?) 증여는 닿지 않을 수도 있다.(지금이 아니어도 언젠가 누군간 알아보겠지.) 그리고 그 증여가 증여로서 발견되기 위해선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상상력의 종류엔 발산적 사고와 수렴적 사고를 소개한다. 발산적 사고는 당연하게 여겨지며 세상에 감각되지 않고 있던 사실을 새롭게 감각하고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헤아리는 능력이다. 수렴적 사고는 당연한 것(세계상)을 전제할 때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범상치 않은 무언가(변칙현상)를 감각하여 세상에 이미 주어져 있는 증여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다.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저자의 주장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잘 해석하지 못하겠다. 정확히 말하면 받기 싫어하는 마음일 수도 있겠다. 그것은 내 인간관 때문인데, 내가 가진 모든 사회성, 친절함, 이해심, 배려심은 마땅히 그것을 베풀어야 해서가 아닌, 내가 그것들에서 비롯한 증여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에서 시작됐다. 내가 받지 못할 것이니 나라도 그것들을 베풀어서 그 행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대가, 호감이나 영향력 같은 것들을 취하자는 생존 전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불합리하게도 받아버린 증여에서 느끼는 부채의식을 통해서만 증여를 할 수 있다는 저자의 첫 전제에서부터 이 책의 메시지가 나에게 통하는 메시지는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생각이 가능하다는 점은 신선하게 생각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