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생흔

하현의 『어쩌다 마트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를 읽고

by 여온

하현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 지금까지는 아티스트의 신보처럼 전작~신작까지의 경험을 엿볼 수 있었다면 이번 책은 하현 작가가 14년 간 가지고 있었던 ‘마트 노동자’라는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 나올 때면 언제나 통시적인 관점에서 감상을 남기고 싶다. 예를 들면 전작 대비 작가에게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찾아보고 싶고, 각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그만의 정서를 발견하고 싶다. 지난 작품들에서 마트 직원으로 일하며 겪은 일화나 느낀 소회를 밝힌 적이 있었나 싶어 찾아봤는데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다 아이스크림을 주제로 한 짧은 에세이집 『좋았던 것들이 하나씩 시시해져도』에서 ‘언니들’이 짧게 등장하는 것을 찾았다.


다른 듯 비슷한 언니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나는 조금 쓸쓸해졌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런 걸까. 마음을 다해 좋아했던 것들이 하나씩 시시해지며 나를 둘러싼 세계 역시 천천히 빛을 잃어가는 걸까. 그렇다면 나도 언젠가 우리 매장 단골손님 투머치토커 할아버지처럼 아무도 묻지 않은 옛날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게 될까? 추억 필터를 얹어야만 모든 게 선명하게 아름다워진다면, 그런 날이 온다면. 『좋았던 것들이 하나씩 시시해져도』, 108쪽


그 대목에서도 마트라는 배경은 언급되지 않고 엄마뻘 ‘언니들’이라는 호칭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인만큼, 하현 작가는 정말 이 이야기를 이 이야기로서만 할 수 있는 지면에 풀고 싶었던 것이라 생각해 본다. 자그마치 14년의 시간을 꾹꾹 눌러담은 이야기, 작가가 ‘다정’이라는 삶의 태도를 모색할 때나 스페인어를 배우며 ‘루시’의 삶을 살아볼 때나 다정하지 않은 현실을 사는 내향인의 삶을 기록할 때나 마음 한 켠에 ‘언젠가 이 책이 나올 것’을 예감했을 것을 상상하니 이 책의 출간이 반가웠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자기 나이를 3만 살로 소개하는 지안에게 “네가 3만 살이구나, 반가워. 난 4만 살”이라 인사해주는 정희가 생각났다.


하현 작가의 책을 읽을 때면 항상 삶의 방식의 간극을 발견한다. 나의 경우 ‘일하는 나’의 정체성이 항상 직렬적으로 존재했던 반면 하현 작가에겐 문장 노동자와 마트 노동자의 삶이 병렬적으로 공존했다. ‘글을 쓰는 나는 돈을 버는 나에게 빚을 지고 있다’던 하현 작가와 달리 직장 생활에서 ‘글을 썼던 나’에게 빚을 진 적이 많았다. 기쁨과 슬픔을 모르는 어른이 될까봐 직장을 떠났던 하현 작가와 달리 나는 인정과 영향력을 얻기 위해 감정과 취향, 정신, 심지어 신체의 건강까지 기꺼이 제물로 바쳐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끝내는 ‘나도 같다’는 느낌을 발굴하는 데 성공한다. 나 또한 “선명한 현재와 불투명한 미래 사이”에서 고민하는 입장이고,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고는 도착할 수 없는 곳”을 찾아 멀리도 헤매며 잃어버려 왔고, 언젠가 일기 같은 글을 쓰면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는 건 피해의식밖에 없는 것 같다”는 문장을 적은 적이 있다. 공감이 불가능하다 느낄 만큼 나와 다르면서 그 속에서 나를 발견하게 만드는 하현 작가의 문장을 읽을 때마다 그의 안녕을 기원하게 되는 것은 내가 나의 안녕을 기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딱 그만큼, 내가 나를 응원하고 싶은 만큼 하현 작가의 다정과 삶을 응원하고 싶어진다.


하현 작가는 이 책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마트일을 하지 않겠다 선언했다. 말하자면 이 책은 마트 직원이라는 정체성에 하현 작가가 보내는 엔딩 크레딧일 것이다. 하현 작가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하든 글을 통해 누군가가 그의 발자취를 목격하는 일을 허락해 주었으면 한다. 그의 현재와 미래에 안부를 전하는 마음으로 이번 책을 통해 그의 과거를 목격했다.


인생을 다 살아 본 것처럼 냉소적인 척했지만 어쩌면 나야말로 가장 간절하게 크레딧을 남기고 싶은 걸지도 몰라. 누구보다 목격자가 필요한 걸지도. 『우리 세계의 모든 말』, 236쪽


그런가 하면 나도 어제를 마지막으로 7년 간 몸담은 회사를 퇴사했다. 나에게도 엔딩크레딧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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