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무척 좋아했지만 요즘은 잘 하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데이터에 따라 잘 설계된 가짜라는 생각이 들면서 몰입이 깨지기 때문이다. 내가 자초해서 잃어버린 취미생활이라 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축구팀을 운영하는 게임인 Football Manager를 며칠이고 플레이하다가 가끔 막힐 때면 유료로 구매한 에디터로 수치를 조작하여 쉽게 이기곤 했다. 원래부터 직접 선수를 조작하지 않고 선수의 능력치, 컨디션, 경기 전술 설정에 따라 시뮬레이션된 결과를 구경하는 게임인데 에디터를 사용하는 이상 모든 변수가 사라지고 그냥 매 경기 승리하고 매년 모든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것을 구경만 하는 게임이 된다. 결핍이 없는 채로 하는 경영 시뮬레이션도 그 나름대로 하는 맛이 있지만 언젠가는 진행 버튼만 클릭하는 데 내 시간을 쓰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게임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다. 요컨대 나는 속한 세계에서 내가 가진 결핍을 채우려 하지만 결핍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그 세계에 흥미를 잃어버리는 사람이란 뜻이다.
소설을 읽을 때도 그렇다. 인물이 가진 결핍과 그 결핍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보며 유쾌와 불쾌를 오간다. 웹소설은 그 간극이 적은 편인데, 특히 ‘회빙환’ 장르는 인물의 결핍이 쉽게 해소된다는 점에서 속 시원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지만 그 서사적 매력은 금방 휘발한다. 『단 한 사람』은 ‘꿈 속에서 여러 죽음을 목격하지만 그 중 하나의 죽음만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라는 설정에서 시작해 그런 능력을 가진 주인공만이 가질 수 있는 결핍, 그런 주인공을 곁에 둔 주변 인물들의 결핍을 관조하듯 서술한다. 웹소설의 세계에선 주인공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판타지적 상상력(회빙환)이 제공되는 데 반해 최진영 작가의 세계에선 판타지적 상상력이 구체화된 현실에 인물들이 피투되어 겪는 실존적 사투가 눈에 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웹소설을 떠올린 것은 지금까지 읽은 한국소설 중 이렇게 장르적 상상력이 도드라지는 작품이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4년 전 사적인서점 처방책으로 『내가 되는 꿈』을 읽은 적이 있었고 지금은 내용이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미래의 내가 보낸 편지를 받는다는 설정 만큼은 기억한다. 책처방은 상담받을 당시의 나를 기준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책처방을 통해 문학의 취향이 만들어지기는 쉽지 않았다. 어쩌면 내 취향을 정확히 저격하는 작가를 만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벌어지는 수 많은 죽음 중 하나를 내 손으로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기적일까, 저주일까. 이 능력으로 내 자식을 구할 수도 있지만 내 자식이 죽어가는 것을 두고 다른 사람을 살려야 할 수도 있다. 임천자는 그것을 기적이라 정의했고 장미수는 그것을 저주라 정의했다. 목화는 그것을 중개라 정의했고 루나는 그것을 선물이라 정의했다. 얼핏보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가장 고통받았던 것이 장미수였다는 점에서 운명을 거부하면 불행해진다는 메시지를 읽어낼 수도 있지만 사실 소설이 말하는 것은 운명은 정의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모두 다르다. 각자의 신이 있는 것이다. 루나의 의지가 아닐 수도 있지만, 철저한 계획에 따라 운명이 주어지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언젠가 루나는 기도를 후회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와 다르게 이번에는 루나가 원했다. 원하는 바를 구했다. 250쪽
실종된 금화의 존재는 목화에게 결핍의 은유로 기능한다. 장미수의 자녀는 5남매로 금화는 일화-월화, 목화-목수라는 이름에 대해 자신만 짝꿍이 없음을 슬퍼한다. 금화가 사라졌을 때 모두가 짝꿍이 있는 가족 구성이 완성되지만 금화의 부재는 가족이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할 결핍으로서의 존재가 되었다. 사람에게 결핍은 어떤 역할을 할까. 결핍을 해소할 수는 없지만 그 결핍이 나를 세계로부터 지켜주는 일은 가능할까.
언니, 나를 도와줘. 난 이 일을 계속하고 싶지 않아. 언니는 방법을 알지?
미안해. 난 너를 도울 수 없어.
금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반가운 악력을 놓치고 싶지 않아 목화는 그 손을 힘껏 잡았다. 금화가 다짐하듯 말했다.
하지만 내가 널 지켜줄게. 146쪽
그리고 금화는 말했다. 너를 돕지는 못하지만 지켜주겠다. 그 말을 수백 번 곱씹으며 목화는 희망과 가능성을 찾으려고 했다. 미로에 이정표를 세우고 싶었다. 금화 언니는 진실을 말했다. 여기 없는 사람이 나를 도울 수는 없다. 그러나 지켜줄 수 있다. 그 믿음은 내 안에 있다. 215쪽
게임을 쉽게 이기려 에디터를 사용할수록 게임을 하지 않게 되는 것처럼, 결핍을 해소하려는 노력은 역설적으로 그 결핍을 극복할 수 없게 만든다. 적어도 나에게 결핍을 해소하는 노력은 크레이터 위에 무언가를 올리는 시도였지 크레이터를 메우는 일은 아니었다. 결핍이 나를 지켜주는 순간은 그것을 메운 순간이 아니라 그 결핍이 나에게 ‘잃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순간일 것이다. 그 결핍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나를 구성하는 것임을 믿는 순간 결핍은 실체를 얻어 세계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외피가 된다. 가진 것 뿐만 아니라 잃은 것으로도 나를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피투된 세계에서 나를 기투하는 열쇠일 수 있겠다는 것을 이 소설을 통해 배웠다.
이제 목화에게 그분의 마음은 중요하지 않다. 알 필요가 없다. 우주에 마음이 있는가? 그저 존재할 뿐이다. 목화는 선하면서 악한 사람을, 의롭고도 불의한 이를, 그러므로 완전한 사람을 생각한다. 2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