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생흔

김화진의 『동경』을 읽고

by 여온

10월의 사적인서점 처방책인 『동경』은 세 명의 주인공들이 관계 속에서 자신의 결핍과 상대가 가진 나에게 없는 면모를 감각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대표님께는 ‘눈도 깜박이지 않을 정도로 읽는 재미가 있는 소설’을 읽고 싶다 말씀드렸는데 동봉된 처방(편지)에 따르면 전 직장을 나와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는 내 상황을 떠올리며 소설의 주인공인 ‘아름’의 처지가 나와 비슷하다고 느껴 이 책을 보낸다고 하셨다. 다른 주인공인 ‘민아’의 제안으로 피규어를 리페인팅하는 일을 하던 아름이 또 다른 주인공 ‘해든’의 제의로 사진업을 하게 되면서 발생하는 사건과 감정을 다룬 이야기였다. 기존 회사에서 권태를 느끼는 인물이 뜻밖의 기회로 새로운 일을 한다는 점, 그 일이 최근 내가 취미 삼은 사진이라는 점에서 나와의 공통점을 느끼셨던 것 같다. 이런 설정 외에도 아름의 성격은 나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 내 성격과 비슷한 캐릭터를 발견했다는 신기함보다는 ‘나 같은 사람이 많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책임감으로 나를 굴려왔는데, 언제나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에 끝까지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는데, 슬슬 어시스턴트에게 넘기는 부분이 늘어가는 스스로를 보며 조금씩 혐오감이 쌓여갔다. 이 일을 잘하는 게 나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구나. 11쪽
나는 잘 붙들리는 사람이었다. 붙잡아주는 쪽에 보통 이상으로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 그걸 저버리면 저 사람을 실망시키겠지, 하고 지레 겁먹는 사람. 33쪽


책은 아름, 민아, 해든의 시점에서 아름이 민아의 직원에서 해든의 직원으로 업을 옮길 때 각자의 심정을 묘사한 뒤 세 명이서 함께 떠나는 삿포로 여행과 그 뒤로도 세 명의 우정이 더 단단해지는 모습을 그린다. 마치 세 명을 꼭지점으로 하는 삼각형을 그린 뒤 그것을 밑면 삼아 삼각 기둥을 올리는 듯한 이야기 구성이라 안정적이라 느꼈다.


민아와 해든과 아름은 처음으로 똑같은 생각을 했다. 셋 중에 자신을 뺀 나머지 둘을 두고 어느 날은 누가 좀 더 좋고, 어느 날은 누가 좀 싫대도, 결국에는 둘 다 좋은 것이 좋다는 생각. 누구도 이탈하지 않은 채로 그렇게 유지되는 삼각형의 마음이 안전하다는 생각. 172쪽
그들이 이루는 삼각형은 각자가 선 자리에 따라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두 점이 유독 가깝고 한 점이 비교적 멀 때는 그 모양이 변했으나, 삼각형은 삼각형이었다. 아닌 적은 없었다. 200쪽


세 명으로 이뤄진 친구 관계는 정말 안정적일까 생각해보면, 어떤 면에서는 그렇고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수다를 떠는 인원이 4명만 되어도 공통 주제가 얕아지는 탓에 깊은 대화는 나누기가 어렵고 상대에게서 나를 발견하는 개인적 관계보단 ‘우리’의 정체성이 더 짙어진다. 그런가 하면 일대일 관계는 가장 깊어질 수 있지만 의견이 양분되거나 일치하는 등 화학작용하는 재미는 좀 떨어진다. 그런 면에서 세 명이라는 구성은 적당한 형태로 보인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상대와 나의 관계의 깊이를 가져가는 동안 다른 한 사람과의 관계가 상대적으로 얕아지기도 하고, 다른 두 명이 나보다 더 가까워지는 모습에 서운함을 느끼는 등 비교열위의 결핍을 더 잘 느낄 수 있는 형태이기도 하다.


나는 해든과 선배가 비슷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잘 알고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들. 그런 둘과 달리 나만 가운데서 갈팡질팡인 사람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나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지 스스로에게 실망하며 돌아왔던 밤을 기억한다. 20쪽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여자들의 우정은 이 정도로 촉촉한가?’였다. 내가 친구들과 소통하는 방식을 생각해보면 서정적인 형태로 우정을 다지는 모습이 신기했다.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 싶다는 희망사항과 달리 갈등이랄 게 없는 이야기였지만 내가 모르는 여자들의 세계를 본 것 같아 신선했다. 나도 내 친구들 사이에서는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지만 구성원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그들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려는 노력을 하지는 않는 편이라 그렇다. 나에게 없는 면모를 친구에게서 발견하며 그를 사랑스럽게 여기는 모습 또한 낯설었는데, 우정이라기 보단 사랑에 가까운 감정이라 느꼈고 11월 책처방 상담에서 대표님께 이런 감상을 말씀드렸더니 여자들의 우정엔 그런 면이 있다고 공감해주셨다. 그렇구나.


가운데서 단단히 팔짱을 끼고 싶었다. 그건 생각보다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남들은 몰라도, 친구들에게 너무 쩔쩔매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친구 되기’가 가장 어려웠다. 같은 일을 하는 동료가 아니어도 선배에게 나는 친구일까? 함께 사진 얘기를 하지 않더라도 해든에게 나는 친구일까? 나는 그런 것이 궁금했다. 23쪽


아름은 해든의 어시가 되어 사진일을 배우고, 그 과정에서 실수하고 반성하며 성장한다. 내가 아름처럼 새로운 직업을 찾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게 될 것을 생각하면 적응하는 과정에서 실수하고 방황할 것이다. 나 역시도 내가 한 실수에 대해 과하리만치 자책하는 성격이라 주니어 시절엔 자기혐오가 성장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것은 좋은 연료가 아니라 매연을 너무 많이 내뿜었고, 새로운 직장에선 좀 더 건강한 방식으로 성장하고 싶다. 새로 사귄 친구와 관계를 맺듯 사회생활이 ‘일’과 관계를 맺는 일이라면 너무 당기지도, 밀지도 않는 형태로 "애정과 서툶의 증거"를 많이 남겨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출판사에서 표지 시안으로 만들어보고 싶다고 연락해 온 사진은 두 개였다. 민아의 뒷모습이 담긴 사진과, 언젠가 아름이 실수로 깨뜨린 도자기 사진. 그것은 아름이 처음으로 작품을 찍은, 작품으로서 찍은 사물, 인간이 아닌 것이었다. 깨진 접시. 얼기설기 겹쳐진 사금파리 대여섯 조각. 늦은 오후의 빛을 온몸으로 반사하는 듯, 주변 공기를 금빛으로 부드럽게 부풀린 듯한 민아의 뒷모습과, 깨진 그릇의 파편을 쌓아올린 무채색의 사진. 그것은 아름이 처음부터, 그리고 줄곧 남기고 싶어하던 우정과 결함의 흔적이었다. 애정과 서툶의 증거. 2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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