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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효정 Mar 20. 2024

낯섦, 틀을 깨고 나아가는 동시

「내 심장은 작은 북 」. 송현섭, 2019. 창비

                                                                                                              



<얌전히>


화장대에서 잘난 체하는 화장품이, (얌전히)

화분의 꽃과 난은 흙 한 톨 떨어뜨리지 않고, (얌전히)

반짝반짝 식탁 번쩍번쩍 컵과 접시도, (얌전히)

화장실의 수다쟁이 두루마리 화장지와 책꽂이의 거만한 책도, (얌전히)

항상 나를 째려보는 거실의 사진도, (얌전히)

밖으로 나가지 못해 기분이 별로인 신발도, (얌전히)


(얌전히, 얌전히, 얌전히)


"오늘 대청소했거든. 너희들 얌전히 놀어야 돼!"

얌전히 있기만 한다면, 엄마는 돌아와서 맛있는 간식을 준단다.


아까부터 바닥이 너무 미끄러워

다리를 꼬고 있던 개가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하고는

다른 개에게 말했다.


"자,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

                                                                                                               (144-145쪽)


 선생님은 어린 시절에 어떤 아이였나요? 전 좀 일찍 철이든 아이었어요. 4살 터울인 동생이 아파서 외할머니댁에 맡겨져 한동안 부모님과 떨어져 살기도 했고, 초등학교 땐 잦은 전학으로 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했죠. (그 시절 대부분의 가정이 그랬겠지만) 집안 형편이 풍족한 편도 아니라 얼마되지 않는 용돈으로 친구들 틈에서 군것질을 참기도 하고, 사고 싶은 것을 포기해야하는 순간들도 꽤 있었죠. 힘들어보이는 부모님에게 짐을 더 지어주기 싫어서였을까요? , 저는 세상과 타협하면서 '얌전히', '시키는대로',  나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살기 위해 애를 섰던 것 같아요.  

 그런 제가 부모님이 바라던 교사가 되고, 결혼 적령기를 넘기기 전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르면서 이전과는 다른 낯설은 세상과 마주하게 되었어요. 좋은 딸 역할은 그럭저럭 해냈던 것 같은데,  좋은 선생님, 좋은 아내, 좋은 엄마까지 되려니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더군요. 그때부터 저에겐 좌절의 순간들이 자주 찾아왔어요.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지 못할 때마다 내가 부족한 탓이라 여기며 고치려 애쓰기도 했는데, 정말 다행인 건 이젠 그 방식이 결코 올바른 방법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는거죠.

 <얌전히>라는 동시에서는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들이 등장해요. 그런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던 모습과는 조금 달라요. 저마다 자신의 생각과 태도를 지닌 존재랄까요. 얌전한 척 가만히 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려주는 듯 하죠. '얌전한' 척 하는 물건들 사이에서 다리를 꼬고 하품을 하던 개가 '자,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 라며 다른 개에게 도발의 말을 건네요. 한번 마음을 먹은 개에겐 엄마의 맛있는 간식도 소용없어요. 동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후 벌어질 개의 소동을 상상하면서 전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어요. 그리고 마흔이 지나서야 '날 째려봐도, 거만하게 놀려대도, 나보다 더 반짝거리며 성공한 그들의 시선에서 언제쯤 난 자유로워질수 있을까?' 를 고민하던 낸게 "얌전히 있지만 말고 뭐든 시작해봐! "라고 말하는 것 처럼 들렸거든요.



<새가 말하네>



새가 운다,라고 쓰면

우습지 않니?

부스스, 아침에 일어난 새가

달처럼 동그란 둥지에서

잠들 때까지 운다면

끔찍하지 않니?


새가 노래한다,라고 써도

우습긴 마찬가지야.

배가 고파도 노래하고

독수리가 쫓아와도 노래한다면

미친 새가 분명하거든.


나는

동시의 첫 문장을 이렇게 쓸 거야.

"짹짹!"

새가 말하네.

                                                                                                                (64쪽) 



 시인들은 저마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의 말로 동시를 쓰잖아요. 동시집을 통해 시인들을 만나다 보니 저도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이 아닌 나의 눈으로 세상을 온전히 보고 싶어졌어요.  <새가 말하네>에서도 동시의 기존 화법을 깨고 싶어하는 화자가 등장해요. '새가 운다', '새가 노래한다'가 아닌 '새가 말한'다로 쓰겠다는 화자는 이 동시를 쓴 시인의 다짐으로 들리기도 해요. 그래서 전 마지막 연에 나오는 '짹짹'을 언젠가는 내 귀에 들리는 새의 말로 옮겨쓸 때가 오기를 기다려. 우리에겐 저마다의 귀와 저마다의 말이 있다고 믿으니까요.

  참! 앞의 동시들은 두 권의 동시집을 낸 송현섭 시인의 동시에요. 송현섭 시인은 첫 동시집 「착한 마녀의 일기」는 기존 동시에서 접하지 못한 낯선 화자의 모습과 섬뜩한 표현들로 동시 독자에게 충격을 주었어요. 기존의 동시 틀을 확 깨버렸다고 할까요.  그의 두번째 동시집 「내 심장은 작은 북 」을 먼저 읽었는데요. 저 또한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동시를 이렇게 써도 괜찮을까?'라는 걱정과 함께 굉장히 낯설고 불편한 감정을 느꼈거든요. 그런데 신기한 건 읽고 난 뒤 또 읽게 되고, 읽고 나서도 동시가 그려놓은 상황이, 인물이, 잔상이 눈앞에 그려지는거예요. 아래 동시를 읽어볼까요?



<담쟁이덩굴의 식사량>



다섯 개의 창문을 싹싹 핥아 먹고요.


열 개의 둥근 문고리를 오도독 씹어 먹고요.


나무에 올라 나무를 통째로 말아 먹고요.


아, 갈증 나! 마당의 우물을 돌돌 감고요.


바퀴 없는 자전거를 꿀꺽 삼켜요.

                                                                                                                (74쪽)                                 



 담쟁이덩굴하면 보통 담벼락에 붙어사는 식물로만 생각했는데, 시인은 이 시에서 담쟁이를 창문과 문고리 나무와 우물, 거기에 자전거까지 꿀꺽 삼키는 무시무시한 괴물로 만들어버려요. 시인이 '싹싹 핥아', '오도독 씹어', ' 통째로', '꿀꺽'이라는 기존 동시에선 접하기 힘든 낯선 표현을 동시로 가져와 자신의 말로 꺼내놓자 벽에 붙어 사는 힘없는 담쟁이덩굴은 마음만 먹으면 세상 모든 것을 삼켜버릴 수 있는 강한 존재로 새로 태어나게 되었어요. 새로 태어난다는 건 어쩌면 기존의 관습들과의 작별 또는 과거의 나를 버려야가능한 일이기도 하잖아요.




<독감>


도둑 까치가 머릿속을 몰려와

어질어질 날아다니고

자꾸자꾸 쪼아 대는 거야.

한 마리가 날아가면 다른 놈이 와서

꼭 그 자리를 쪼는 거야.

몸이 고드름처럼 꽁꽁 얼었다가

뜨거운 모래밭의 지렁이처럼 뜨겁기도 해.

배고픈데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모든 과자 맛이 똑같아.

한 일주일쯤 덜덜, 헉헉

겨울과 여름을 빠져나온 느낌이야.

우리 할머니가 그러는데

내가 완전히 나은 건 아니래.

또 우리 할머니가 그러는데

밖에 나가서 맨 처음 만나는 친구가

내 독감을 가져갈 거래.

그게 누구냐고?

정말 미안한데…… 난

지금 막 집에서 나오는 길이야.

                                                                                                               (20-21쪽)


 큰 열병을 앓고 나면 '겨울과 여름을 빠져나온 느낌'처럼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 긴긴 시간을 헤매던 나를 다시 되찾은 기분이 들어요. 고민은 염려를, 염려는 불안을, 불안은 걱정을, 걱정은 우울을 부른다는 것을 이젠 알아요. 어쩌면 '모든 과자 맛을 똑같이 만들어버리는 무서운 독감에 걸린 아이처럼 불안과 우울에 휩싸여 삶의 맛을 제대로 느낄지도 못하는 때가 찾아올지도 모르죠. 완전히 나은 때란 과연 찾아올까라는 생각도 가끔은 해요. 그럼에도 전 더이상 세상이 원하는 모습으로 얌전히 있거나, 날 아프게 하는 독감을 혼자 낑낑대며 끝까지 갖고 살지는 않으려해요. 

 송현섭 시인의 동시집에 실린 낯섦과 만나는 그 순간, 완벽한 척 살아온 삶에 작은 균열이 생겨나기를 바라요. 그 시작으로부터 내가 만들어 놓은 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테니까요.  착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좀 낯설면 어때요. 낯섦은 선생님들에게 더 넓게 보는 눈을 선물해 줄 거라 믿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랑 같이 '정말 엄청 겁 없는 개구리'가 되어 <뱀쇼>를 보러 갈래요? 우리 앞에 어떤 공연이 펼쳐질지는 직접 가서 봐야 아는 거니까요!



<뱀 쇼>


엄청, 정말 엄청

겁 없는 개구리들이

뱀 쇼를 보러 가기로 했어.


"한번 가 보는 거지 뭐."

"관객인데, 우릴 어쩌겠어?"


미끈거리는 다리를 꼬고

개골개골 앉아 있는

개구리들을 보자

뱀은 자존심이 꼬일 대로 꼬였어.


'세상에, 개구리들을 위해 쇼를 하다니.

다른 뱀들이 알면 나를 뭐로 보겠어.'


쇼에 집중할 수가 없었던, 뱀은

꼬리 끝에서 머리끝까지 꼬불꼬불 화가 난, 뱀은


조련사가 활짝 웃으며

아가리를 손에 넣었을 때

꽉 물고 말았지 뭐야.


조련사의 빨간 비명 소리가

개골개골 개골개골

사방으로 튀었지 뭐야.


                                                                                                               (14-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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