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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오로라 Jun 12. 2024

하늘과 나무, 바람이 머무는 동시

《가랑비 가랑가랑 가랑파 가랑가랑》정완영. 사계절. 2007

나는 한평생 시조만 써 온 할아버지 시인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맑고, 밝고, 깨끗한 세상을 이뤄 나가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여기 몇 편의 동시조를 보냅니다. 시조가 우리 민족만이 가진 우리 가락, 우리 노래라면 동시조는 우리 아이들의 노래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어울리는 노래와 춤, 그림을 품고 있는 게 동시조입니다.
                                                                                           -시인의 말 중


  시조는 한국 고유의 정형시로 3장(초장-중장-종장) 6구 4보격 12음보 총 45자 내외로 쓴 문학의 한 장르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시조라고 하면 뭔가 예스러운 글과 어려운 한자어로 쓰인 작품을 떠올리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럼, 평생 시조만 써온 할아버지가 쓴 동시는 어떨까요? 바로 정완영 시인이 그런 할아버지거든요. 시인이 "우리 아이들에게 어울리는 노래와 춤, 그림을 품고 있는 게 동시조"라고 소개하며 여러 동시를 썼는데 그중 하나인 《가랑비 가랑가랑 가랑파 가랑가랑》을 함께 읽어볼까 합니다.




과수원에서


철수가 손짓하면 순이가 놀러 오듯

과목나무 가지 끝에 휘파람새 앉아 울면

내일은 복사꽃 찾아와 가지마다 등을 답니다.


-22쪽



 복사꽃 하면 어떤 것이 떠오르나요? 복사꽃을 한자로 '도화'라고 하잖아요. 중국 문화에 좀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삼국지의 '도원결의'나 신선들이 한가로이 머무는 '무릉도원'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 동시에서 시인은 복사꽃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철수가 손짓하면 순이가 놀러 오듯" 휘파람새의 울음소리에 "복사꽃이 찾아와 가지마다 등을" 달거라고 말하거든요. 전 어린 시절 할아버지 과수원에서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핀 것을 본 적이 있어요. 그래서인지 종장 부분을 읽는 순간 활짝 핀 복사꽃으로 가득 찬 과수원이 제 눈앞에 그려졌답니다. 선생님은 어떤 장면이 그려졌나요?

 하지만 저처럼 복사꽃에 대한 특별한 추억이 없더라도 이 동시조가 마음에 들었다면 종장의 첫 3음절 때문이라 짐작해봅니다. 시조에선 종장의 첫 음보는 반드시 3음절로 써야 한다는 사실! 물론 동시조에서 이런 시조의 정형이 잘 지켜졌다는 것도 흥미롭지만, 이보다  "내일은"이라는 시어가 주는 묵직한 메시지가 작품의 수준을 한단계 높였다고 생각되거든요. 단지 활짝 피는 복사꽃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찾아올 희망을 기다리는 시인의 마음이 보였다고 할까요. 



들길에서


바람결에 실려 온 물, 물에 실려 오는 바람

개구락지 한 마리가 하늘 업고 놀고 있다

하늘도 물속에 내려와 개구락지 업고 논다.


-33쪽


 


 혹시 종장의 첫음보를 눈여겨 보셨나요? 

 위 동시 <들길에서>는 하늘과 바람, 개구리와 물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들길의 풍경을 그리고 있네요. 아마 시인은 들길 옆 흐르는 시냇물에서 첨벙 뛰어노는 개구리를 보았나 봅니다. 물에 비친 하늘과 개구리가 일으키는 물결이 마치 바람처럼 느껴진 걸까요? 아니면 하늘, 바람, 개구리가 물이라는 개체를 통해 하나가 되어 노는 상상을 한 것일까요? 개구리가 하늘을 업고, 하늘도 개구리를 업는 모습이 시인이 말한 "맑고, 밝고, 깨끗한 세상"이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 '물아일체'.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상태를 뜻하는 말처럼 자연 속에서 놀이에 푹 빠진 어린이의 모습이 살짝 보이는 듯도 하고요.



 

가을 하늘 2


요즘 하늘빛은 하루 한 길씩 높아 가요

저러다 넘칠 것 같아요 무너질 것 같아요

구름도 따라가다가 지쳐 눕고 말아요


-56쪽



 이 동시조집 3부엔 <가을하늘> 연작이 실려있어요. 그중 <가을하늘 2>가 저는 가장 마음에 들더라고요. 화자는 높고 푸른 가을 하늘 "하늘빛은 하루 한 길씩 높아" 간다고 하네요. 초장에서 쓰인 "한 길"은 우리나라에서 쓰는 옛 길이 단위로 어른의 키 높이 정도를 말한대요. 하늘빛 이리 쑥쑥 높아져가다보면 결국엔 넘쳐서 무너질 것 같다는 표현이 재미있기도 하고, 하늘빛을 쫓아가다 지쳐버린 구름의 모습도 귀엽지 않나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가는 아이들을 보면 진짜 저러다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들때가 있는데, 가을 하늘을 '어린이'로 생각해본다면 또 다르게 읽혀지지 않을까 싶어요. 동시는 읽는 사람의 해석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의미로 다가오니까요. 그래서 해석의 층위가 다양한 동시가 좋은 동시라고 하나봅니다.


 이 동시집의 차례는 1부-울 엄마의 봄, 2부-연잎 우산, 아주까리 우산, 3부-고추잠자리, 4부-눈 내리는 밤으로 짜여졌어요. 차례만 살펴보아도 사계절에 맞춰 작품들을 잘 배치한 느낌이 듭니다. 계절에 따른 자연의 아름다움을 동시조라는 문학 장르를 통해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기에 나올 수 있는 배치겠지요. 

 다 읽고 나니 비단 아이들 뿐만 아니라 삶에 지쳐있는 어른에게도 쉼을 주는 동시집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너진 어른들의 세상을 바로 세울 힘은 우리 아이들의 깨끗한 가슴에서 나"온다는 시인의 말이 곁에서 들리는 듯 합니다. 우리 아이들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해서 더 맑고, 밝고, 깨끗한 동시가 많이 많이 세상에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며칠 전 반 아이들과 필사한 <나무랑 바람이랑>을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글을 마칠까 합니다. 아래의 동시를 읽는 순간만이라도 초록으로 가득 찬 여름의 숲에서 바람이 들려주는 노래와, 나뭇잎이 추는 춤을 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무랑 바람이랑


바람이 흔들어 주어야 나뭇잎이 싱그럽고

나무가 출렁거려야 바람이 파도 탑니다

바람은 나무의 음악, 나뭇잎은 바람의 춤.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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