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이 난 한 아이가 길을 걸어갑니다. 학교 선생님께 혼이 났을까요? 아님 친한 친구들과 다툰 걸까요? 음, 가기 싫은 수학 학원을 가야 해서 짜증이 났을지도요. 그런 아이에게 할머니는 "얘야, 이걸 좀 들어다/ 저기 슈퍼 앞에 놓아 다오."라고 어제와 같은 부탁을 합니다. 짜증 난 아이는 들은 체 만 체 지나치려 하죠. 아이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는 할머니는 "어제 어떤 애는 잘 들어주더구먼."이라며 푸념합니다. 할머니는 눈이 잘 안보이시거든요.
"어제 그 애가 나예요."라고 말도 못 하고 짐을 드는 아이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일은 난 왜 하고 있는 걸까. 심지어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2주에 한 번씩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는 걸까. 꼬리를 무는 생각. 난 왜 동시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걸까.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동시를 알게 된 뒤 참 열심히도 동시집을 찾아 읽었어요. 당시엔 살기 위해 읽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아요. 동시가 두려움과 불안, 걱정과 화로 가득했던 제 마음을 조금씩 풀어줬거든요. 동시를 읽는 과정 중에 생각지도 못한 위로를 받기도 하면서 다시 살아갈 힘도 얻었어요. 지금은 위 동시 속 화자처럼 꼭 티 내지 않아도 옳은 선택과 행동을 하려 노력하는 나를 사랑하게 되었고요.
가겟방에서
과일 파는 영우네 집에
숙제하려 모였다.
과일을 먹으며 장난치다가
가게에서 다투는 소리 들려와
멈추었다.
어떤 욕하는 소리에 맞서
영우 엄마도 욕을 했다.
잠시 후 영우 엄마 우는 소리,
방구석에서 영우도 눈물을 글썽였다.
우리들은 잠자코
귤 쪽들처럼 붙어 앉아
책을 폈다.
이상하게도 숙제가 잘 되었다.
38쪽
동시라는 게 참 신기해요. 읽다 보면 '어린 시절의 나'가 두둥실 하고 떠오르거든요. 그리고 잊고 있었던, 잊으려 했던 기억들이 뒤따라와요. 영우네 집에 모인 아이들처럼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모여 숙제하던 기억, 엄마가 슬프게 울던 모습 같은 것들요.
동시는 끝까지 희망을 이야기해요. "과일 먹으며 장난치"던 아이들이 영우 엄마와 영우의 눈물에 모두 "잠자코 귤 쪽들처럼 붙어 앉아/ 책을" 펴게 되는 순간에도요. 함께 한 아이들도 껍질이 벗겨진 귤 쪽들처럼 발가벗겨진 기분이 드는 건 영우의 아픔이 영우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겠죠. 그래서일까요. "이상하게도 숙제가 잘 되었다."로 끝나는 마지막 연이 더 아프게 다가옵니다.
힘없는 존재들이 다닥다닥 붙어 서로의 온기에 기대는 것. 어려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고, 힘들어도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다지는 것. 이게 바로 동시가 희망을 말하는 방식이기에 슬프지만 다시 힘을 낼 수 있는 거겠죠.
우리
느티나무랑
강아지 복실이
나
셋이 논다.
느티나무가
잎사귀를 떨어뜨리면
나랑 복실이는
그걸 잡으려고 폴짝폴짝.
셋이서 우리다.
82쪽
'우리'라는 말은 참 다정해요. '느티마루, 강아지 복실이, 나' 셋이 만나 놀면 그걸로 충분하니까요. 나는 그럼 무엇으로 셋을 만들어볼까 생각해 봅니다. '동시, 글쓰기, 그리고 나' 좋은 동시를 만나면글쓰기와 손잡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놀아보는 이 공간. 그래서 이 연재를 계속하고 있나 봐요.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하는 일도 아니지만 재미가 없다면 계속 쓸 수 없을 테니까요. 재미있게 놀다 보면 셋이 넷이 되고, 넷이 다섯이 되고, 또 더 큰 우리가 될 수 있으리라고 믿어봅니다. 동시가 말해줬거든요. "언제나 네 곁에 있을게."라고요. 호숫물과 같은 동시 속에서 "맑고 따스하게" 모여 마음을 함께 나누기를, 그리고 동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더욱 많아지기를 꿈꿔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