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여름이 참 빨리도 찾아왔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현상을 이상기후 탓이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적어도 《여름 아이》를 읽을 때만큼은요. 동시집을 읽기 시작하면 이 더위마저도 사랑스러워집니다. 마치 앵두가 “나는 앵두다 소리치며” “다다다다” 뛰어오는 모습처럼, “앵두야” 부르면 “응응응응응응/ 대답하”는 것처럼 여름이 다가오니까요. 계절을 타는 동시집이 있다는 말은 여태 들어보지 못했지만, 이 동시집만큼은 확실히 계절을 타는 것이 분명합니다. 동시 속 화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덥기만 했던 여름이 특별함을 품은 계절로, 마냥 흘려보내기만 했던 일상도 어쩌면 내내 반짝였을지 모른다는 기대도 품게 만들거든요.
여름, 일기
우선 ‘오늘 나는’이라고 써 놓는다
그리고 오늘 뭐 했더라?
고민하는 동안 날씨를 쓴다
해 구름 비 눈을 그려 놓고 동그라미를 칠까
갸우뚱, 오전은 무지 덥고 오후는 그냥 더운 날인데
어디에 동그라미를 칠까
창가에는 비가 저 혼자 내리다 그쳤는데
어디에 동그라미를 칠까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에 가고 학원에 가고 집에 와서 밥 먹고 숙제했는데
오늘 뭐 했더라?
일기는 하루에 겪은 일 한 가지를 쓰라는데
느낌과 이유를 치킨보다 맛있게 쓰라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쓰면 작가가 된다는데
아버지는 곱창에 소주를 마시느라 돌아오지 않고
나는 왜냐면, 왜냐면을 계속 쓰고
술잔에 술 따르는 소리 자꾸 귀에 들리고
아버지는 곱창에 소주를 먹으며 마무리를 하고
나는 서둘러 ‘참 재미있었다’로 마무리를 하고
어린 시절, 여름 방학을 기다린 설렘 비슷한 감정들은 어느새 아마득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여전히 아이들은 신나게 놀 여름 방학을 기다리지만, 교사가 된 뒤론 다른 이유로 방학을 기다리게 되었거든요. 혼이 쏙 빠질 정도로 바쁜 1학기를 보내다 보면 설렘보단 절박함 혹은 간절함에 가까운 기다림이라고 해야 할까요. 방학식날 아이들이 모두 떠나간 텅 빈 교실에서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고 삐뚤어진 책상과 의자를 정리하다 보면 안도감 뒤에 따라오는 허탈함을 한 번쯤은 느껴보셨으리라 생각해요.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에 가고 학원에 가고 집에 와서 밥 먹고 숙제했는데/ 오늘 뭐 했더라?"라는 질문처럼 매일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가고 수업을 하고 맡은 일을 하고 또 짬을 내서 글을 쓰는 그런 삶.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지만 그럼에도 작은 의미라도 붙잡고 싶은 하루. 그래도 "나는 서둘러 '참 재미있었다'로 마무리를 하"는 화자처럼 서둘러 '1학기 참 보람 있었다'로 마무리를 하며 여름 방학을 맞이합니다.
여름, 옛날이야기
이제 아무도 나에게 사람 젖을 먹고 자란 늑대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아요 쌍둥이 인디언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아요
나는 다 컸나요
그러나 나는 밤마다 듣던 옛날이야기들이 어디에 모여 있는지 알아요
오른쪽에서 두 번째 모퉁이를 돌아서, 아침이 올 때까지 똑바로
이렇게 주문처럼 외우면
달빛 가득한 숲 아래에 도착해요
그곳에는 어린아이들이 빙 둘러앉아 늑대가 키운 소년 이야기를 듣고 있어요 쌍둥이 인디언 이야기를 듣고 있어요
내가 들었던 옛날이야기들이 도란도란 밤새 모여 이야기하는 곳이 있어요
나이가 든다는 것은 더 이상 호기심과 설렘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주변의 일에 크게 동요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내는 것이 성숙한 어른의 모습 중 하나니까요. 하지만 어른이 되니 내가 만들어놓은 컴포트존에서 벗어나기가 점점 힘들어집니다. 그래서일까요. "나는 다 컸나요"라고 묻는 화자의 질문이 마치 나에게 되묻는 듯합니다. 대답을 하고 싶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 밤마다 듣던 옛이야기가 더 이상 들리지 않듯 어른이 된 나는 한동안 꿈, 희망, 사랑 이런 것들과 멀어진 삶을 살았으니까요. 하지만 내가 지금껏 살아온 삶의 방식이 과연 옳은 것인지 판단하기 힘들어진 그때, 동시를 읽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에서 말하는 밤마다 잃어버린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이 저에겐 동시니까요. 매번 동시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쫓아 "달빛 가득한 숲 아래에 도착"하는 순간을 꿈꿉니다. 잃어버리고 살았던 나, 순수한 본성에 가까운 어린 나라면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고 믿게 되었거든요. "오른쪽 두 번째 모퉁이를 돌아서, 아침이 올 때까지 똑바로" 가다 보면 동시는 늘 그곳에서 이야기를 들려줄 준비 중이라는 것도요.
여름, 오후 세 시
어린이 도서관 매트 위에 엎드려 책을 읽으면
눈알이 살살 녹아요
글씨가 흐물흐물해요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컹컹 짖어도
오후 세 시는 넘쳐흐르는 잠을 배불리 먹어 치워요
얼마나 더 더워질지, 이 더위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여름 방학의 마지막 날도 다가오겠죠. 위의 시를 읽다 보니 방학이 끝나기 전,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적어도 하루는 동시집을 잔뜩 쌓아두고 읽어보고 싶어 집니다. "눈알이 살살 녹"고 "글씨가 흐물흐물해"지는 오후 세 시에 잠을 배불리 먹어치우는 여름을 만날 생각에 잠시 설레네요.
우리의 여름은 이렇게 지나가고 또 가을이 찾아오겠죠. 《여름 아이》동시집 속에는 〈여름,-〉으로 시작하는 연작이 많이 있는데 다 소개해주지 못해 아쉬울 따름입니다. 가을이 오기 전 꼭 이 동시집에 등장하는 주인공이자 화자인 여름 아이를 만나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를, 다가올 가을을 더 기쁘게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학기 정말 정말 고생많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