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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오로라 Aug 28. 2024

당신에게 꼭 주고 싶은 동시

《나의 작은 거인에게》이안 엮음. 상상. 2024


예쁜 편지지를 봤어

김성은


  예쁜 편지지를 사려면 편지를 써야 하고 편지를 쓰려면 그리운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리우려면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고 떨어져 있으려면 잘 가 인사를 해야 하네 인사하려면 눈물을 글썽여야 하고 눈물을 글썽이려면 좋아해야 하고 좋아하려면 함께하는 게 많아야 하고 그러려면 꼭 붙어서 떨어지지 말아야 하네


  그러면 그리울 새가 없고

  그러면 편지 쓸 사람이 없고

  그러면 예쁜 편지지를 살 필요가 없고

  그러면 돌아서야 하는데


  예쁜 편지지는 눈에 밟히고

  자꾸만 아른거리고


28쪽



 편지이야기 1.

 매주 주말이 다가오면 반가운 동시 편지를 기다리게 됩니다. 그것도 아주 정확하게 토요일 9시와 일요일 10시 두 번. 편지가 도착하거든요. 바로 삼일문고의 <산비둘기>와 동시마중의 <블랙>에서 보내주는 동시 레터링을 말합니다.

 <산비둘기>는 기존에 발표된 동시 1편과 함께 글동무의 정성스러운 단상을, <블랙>은 따끈한 신작 동시를 처음으로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선뜻 내어주는, 참으로 고마운 서비스입니다. 누구든 구독 버튼 하나만 누르면 매주 이런 정성스러운 편지를 받을 수 있죠. 저는 이런 편지에 답장이라도 하듯 댓글에 감상평을 달거나 필사 노트에 옮겨 적어보기도 한답니다.


 편지이야기 2.

 전 손 편지 쓰는 걸 좋아해요. 최근엔 지인들에게 동시 캘리를 써서 엽서를 종종 선물하기도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동시를 좋아하라고 무조건 강요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나만 알고 있기엔 아쉬우니까요. 그러던 중 블랙 동시 선집이라는 타이틀로 발간된 《나의 작은 거인에게》라는 동시집을 읽게 되었습니다. 참 좋았습니다. 12명의 시인이 모여 자신이 가장 잘 쓴 동시 동시 5편을 고르고 골라 보여주더군요. 그리하여, 이 동시집은 제 곁에서 저의 동시 사랑을 지켜봐 주고 있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선물한 첫 동시집이 되었습니다.




  방주현, 현택훈 시인은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는 첫 동시집을 낸 분이고, 김기은, 김성은, 김영경, 방지민, 온선영, 윤정미, 이소현, 이준호, 조인정, 최문영 시인은 머잖아 나올 첫 동시집의 세계가 기대되는 분들이다. ……(중략)…… 스타일을, 그에게만 유일하게 허용되는 모든 것이라고 한다면, 이 책의 수록 시인 모두가 그의 것으로만 유일하게 허용되는 모든 것의 자리에 정확히, 서로 다른 12가지 방식으로 도착하길 바란다.


6쪽. 엮은이의 말 중.




 레터링 서비스 <블랙>을 통해 자신의 첫 시를 발표한 시인 3명 포함하여 2020년 이후 등단한 신인 작가가 9명이나 된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동시집을 읽다 보면 마치 베스킨라빈스의 31가지의 아이스크림을 고를 때의 설렘과 비슷한 감정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언제든 12명의 시인들이 선보인 동시를 취향껏 맘대로 골라 읽을 수 있거든요. 우리 동시의 현재와 미래의 맛을 살짝 느껴볼 수 있달까요. 무엇을 고를까 고민되면 아무거나 골라서 읽어도 상관없다는 점이 이 동시집이 지닌 큰 강점처럼 보입니다.




어머어머어머

조인정


  어머어머어머 오늘도 늦었다 늦었어

  어머어머어머 이게 왜 이렇게 됐니 누가 그랬니

  어머어머어머 날씨가 너무 좋아 하늘도 너무 예쁘지

  어머어머어머 맛있다 맛있다 빨리 먹어 봐


  우리 엄마가 어머어머어머를 하루에 몇 번이나 말하는지 들어 볼래

  우리 엄마가 어머어머어머를 하루에 몇 번이나 말하는지 세느라 정신이 없어


  어머어머어머는 요정 할머니의 주문 같은 말이야


  어머어머어머 하면 일어난 일들이 괜찮아지고

  어머어머어머 하면 일어날 일들이 기대가 된다


  잘 모르겠는 일들은 모르는 대로 그대로 두기로 하자

  어머어머어머 어머어머어머 하다가 따라서 같이 웃으면 돼


  어머어머어머가 작은 새처럼 창가에 앉아 웃고 있어


108쪽.




  이 책에 실린 여러 좋은 작품 중에서도〈어머어머어머〉는 올해 5월 동시마중 작품상을 받았답니다. 그전부터 제가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있던 시인의 쓴 작품이라서 대표작으로 뽑아보았어요. "잘 모르겠는 일든은 모르는 대로 그대로 두기로 하자// 어머어머어머 어머어머어머 하다가 따라서 같이 웃으면 돼"라는 부분이 특히 마음에 들어서 한동안 속으로 '어머어머어머'를 부르고 다닐 정도였으니까요.

 이전에는 "어머어머어머"라는 말이 가진 힘이 이렇게나 강력한 것이었는지 미쳐 몰랐습니다. 이 동시를 읽게 된 후부턴 교실에서 아이들이 다투는 모습을 보게 되면 '어머어머어머'하며 서로 화해시키고요, 곱셈구구를 잘 못 외우는 아이들이 있어도 '어머어머어머'하면서 다시 외우도록 기회를 줄 수 있었어요. 제 실수로 오후에 있는 기획위원회에 늦어도 '어머어머어머' 웃으며 들어갈 수 있고, 늦잠 자느라 학교에 지각한 아들의 통화에도 '어머어머어머' 하고는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언어의 힘 덕분에 한동안 잘 버틸 수 있었답니다.




 제 글 통해 만난 동시가 선생님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제 글이 누군가의 마음에 위로가 되기만 바랄뿐이죠. 아래의 동시처럼 동시 씨앗을 심는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제가 심은 씨앗이 싹을 틔울지, 꽃을 피울짐작조차 할 없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동시와 함께 하다 보니 무엇이 되든, 무엇이 되지 않든 다 괜찮은 일이라 여기기로 했거든요. 동시가 품고 있는 씨앗은 각자의 마음속에서 잘 자라날 거고, 그 속에서 동심 또한 지켜질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쓰기 위해 예쁜 편지지를 사는 화자처럼, 전 글을 쓰기 위해 동시집을 사서 열심히 읽겠습니다.

 오늘만큼은 '어머어머어머' 말을 기억하며 힘나는 하루하루를 보내시길요!




씨앗

방주현


어제 너를 만나

씨앗을 심었어


무슨 씨앗인지

나는 아직 몰라


네 밭에 심었는지

내 밭에 심었는지

그것도 아직 몰라


싹이 나면 알겠지

꽃이 피면 알겠지


우리가 어제

무엇을 심었는지

어디에 심었는지


오랫동안

궁금할 거야

우리는 어떤 열매를 갖게 될지


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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