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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오로라 Aug 23. 2024

소중한 일은 눈에 잘 보이지 않지

《어떤 것》 송진권. 문학동네. 2019

봄비


  괜히 심술부리느라고 살구 꽃이파리만 쥐어뜯고 간 줄 알았더니

  사립문 옆 작약 순이 사슴뿔처럼 돋았다

  보리밭은 파르름하니 웃자라 보리가 팼다

  완두콩이 넝쿨손을 뻗어 끈을 움켜쥐었다

  원추리는 소복하게 새순을 내밀었다

  꽃다지는 좁쌀을 엎은 듯 튀발을 했다

  산들이 털갈이 끝낸 소같이

  연한 빛깔로 일어섰다

  할머니가 머리에 수건 쓰고 밭에 나갔다


  다 봄비가 한 일이었다


53쪽



 무척이나 더운 여름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올해 여름 방학은 유난히도 짧았습니다. 하루종일 방바닥에 누워 동시집을 읽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미쳐 이루지도 못한 채 2학기가 시작되었으니까요. 날씨는 여전히 덥고, 오랜만에 켜진 교실 에어컨만이 너무나 짧았던 여름방학을 향해 시위하는 듯 더운 바람을 뿜어냅니다.

 짧은 방학이 아쉬운 건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개학 날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었던 사람?"하고 물으니 열 명 넘는 아이들이 손을 번쩍 들었거든요. 그래도 방학 숙제 검사는 해야겠지요. 양심껏 숙제는 단 두 개. <문 리버> 리코더 연주 완성과 세줄 쓰기 매일 1편. 반주 위로 얹어진 아이들의 리코더 소리가 제법 훌륭하게 들립니다. 세줄 쓰기는 총 21편만 써도 되는데 그 이상 써온 친구들도 여러 명입니다. 아침에 일어나기 가장 힘들었던 사람이 아마 저인 것 같아 괜히 찔립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보니 갑자기 없던 힘이라도 내야 할 것 같거든요.

 아이들이 리코더를 처음 불었던 때가 4월인데 이제는 계이름만 보여주면 리코더 위에서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움직입니다. 낮은 도를 내기 위해 얼마나 부단히 노력했을지 참으로 기특합니다. 그리고 이런 경지(?)에 오를 수 있도록 지도한 저 스스로에게도 칭찬해주고 싶습니다. 곡 하나를 연주하기까지 구멍을 다 막아야 제대로 소리가 난다고 손을 하나하나 잡아주던 일, 계이름을 일일이 따라 적어주며 운지법을 보여주는 일, 모든 아이들이 제대로 소리를 내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것은 생각보다 끈기가 필요한 작업이거든요.

 교사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따진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하긴 제가 교실에서 하는 일의 대부분은 어느 교실과 다름없고, 대한민국 초등교사라면 누구나 하고 있는 일이니까요. 큰 일을 하는 세상 사람들 눈에는 이런 일들이 정말 별일 아닌 일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렇기에 "다 봄비가 한 일이었다"라는 마지막 연이 저에게 큰 위로가 되나 봅니다.  마치 위 시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봄비'가 교실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선생님처럼 보였거든요. 하지만 봄비에게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을 다 했어요?"라고 물어본다면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까요.

 "난 단지 내리기만 했을 뿐인걸요."

 


돌 밑


돌을 들추니

지렁이, 달팽이, 애기 지네, 개미 들

옷도 안 갈아입었는데

갑자기 불을 켜면 어쩌느냐고

개미는 아기들 놀란다고 알을 물고 야단법석

지렁이는 벗어 둔 안경 찾는다고 더듬더듬

애기 지네는 신발 신느라고 허둥지둥

달팽이는 마음만 급해 집에 뭘 두고 나왔다고

들어가더니 영 다시 나오지를 않고


미안해서

얼른 불을 꺼 주었지요


52쪽


 <돌 밑> 시에 등장하는 화자는 돌을 들춰봅니다. "지렁이, 달팽이, 애기 지네, 개미 들 "은 아직 "옷도 안 갈아입었는데" 말이죠. 정말 실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부모라고, 교사라고 아이들을 이렇게 마구 들춰보는 건 아닌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밖으로 빨리 나오라고 재촉하는 것은 아닌지 어른의 위치에서 반성하게 하는 동시입니다. 저라도 어른을 대표해서 "미안해서/ 얼른 불을 꺼 주"고 천천히 준비해도 된다고 사과해야겠습니다.

 하긴, 교실에서 아이들을 찬찬히 보다 보면 저마다 자신의 속도대로 잘 크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이것도 여러 아이들을 만나고 가르치다 보니 체득된 감각이라고 할까요. 새 학기마다 교실에서 만난 아이들 모두가 그랬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잘 표현하는 아이가 있지만 짧은 글 하나도 천천히 읽어야 하는 아이가, 어느 누구랑도 사이좋게 노는 아이가 있지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조차 어려워하는 아이가 늘 있었거든요. (어디 이것뿐이겠어요?)

  교사로서 저마다 다른 속도로 자라는 아이들에게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지금 자신보다 아주 조금 더 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 주어진 기회를 잡고 해낼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일이라는 걸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같아도 차츰차츰 모든 아이들이 동시를 쓰고 책 읽는 시간을 기다리고, 나의 감정뿐만 아니라 상대의 감정도 공감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다정한 교실이 되는 것은 덤이랄까요.

 교실에서 하는 일의 대부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아요. 성실함과 다정함, 배려와 양보 같은 것들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겠어요.

 2학기가 시작되고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얘들아, 생각보다 우리에겐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어. 아마 금방 헤어질 시간이 다가올 거야. 남아 있는 시간 좀 더 좋은 기억과 행복한 경험을 이곳에 많이 남기자."

 올해는 유독 아이들이 사랑스럽습니다. 동시 덕분인지, 아님 아이들 덕분인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보니 "우리 선생님이 최고다, 좋다." 자주 표현하는 아이들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가을이 오고 금방 겨울이 오겠지요. 이 아이들과 헤어지면 또 언제 그 말을 들어볼 수 있을지. 뭐, 그래도 괜찮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일들을 하며 지내다보면 아이들은 나를 기억해 주리라, 동시 속에서 다정했던 우리 교실을 추억하리라 믿으니까요.



트라이앵글


세 사람이 살았는데

한 사람이 어디로 갔어

두 사람만 남았어


한 사람은 새를 따라갔다고도 하고

산을 넘어가는 걸 봈다고도 하고

말을 타고 갔다고도 해


두 사람은 한 사람을 생각하며

세 사람이 좋아하던 국수를 먹어

울면서 국수를 먹어

어디서 아프지나 않은지

밥은 굶지나 않는지


한 사람도 두 사람을 생각해

두 사람도 한 사람을 생각해

울면서 퉁퉁 불은 국수를 먹어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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