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 영어 교과서에 동물 마스코트 만들기 코너를 보고는 흥분한 아이들이 빨리 하고 싶다고 하도 졸라대기에 덜컥 약속했는데...아차!
"그럼 그럼, 알지. 그전 수업 열심히 들으면 만들거야."
원래는 덤벙대고 잘 잊어버리는 성격이지만 오랫동안 교사로 살다보니, 겉으로는 철저하고 계획적인 사람처럼 보이는 방법은 잘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실제론 출근 길에 가스레인지에 불을 끄지 않은 것 같은 찜찜함에 다시 차를 돌리기도,차키를 챙기지 않아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집으로 가기도 하는 나입니다.
그래서 <깜박 가족>을 읽다보니 "까맣게 곰국을 태"운 엄마가 꼭 저 같습니다. 고맙게도 할매의 "까짓것 다 괜찮다"하는 말이 이전에 한 나의 실수와, 앞으로 하게 될지 모를 실수까지 용서받는 기분입니다. 할머니가 그동안 살면서 체득한 지혜일테니까요.
파란 물감
파란 물감을
조심해
테레빈* 냄새 풍기며
첼로 음악을 듣는
녀석이야
파란 물감이 보이면
멀리 피해 다녀
그 녀석이 슬쩍
옷자락에라도 묻으면
그땐,
소용없어
지우려고 하면 더
번질 거야
마음까지
물들어 버릴 거야
파란 화가의 꿈을
꾸게 될 거야
*유화를 그릴 때 쓰는 소나무 기름.
98쪽.
시에서 파란 물감은 "테레빈 냄새를 풍기며/ 첼로 음악을 듣는/ 녀석"이라고 표현되는데요. 파란 물감의 모습을 보아하니 평소에 하기 힘든 고상한 취미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담 선생님에게 '파란 물감'은 무엇인가요? 나에게 영감을 주는 어떤 것, 그러나 나의 일상을 뒤흔들 정도의 위험을 지닌 존재 말이에요.
저한테는 파란 물감이 '동시'이지 않을까 생각해봤어요. 눈 앞에 닥친 일들을 해내기도 벅찬 하루를 살아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동시를 읽고 있는 저를 발견하거든요. 동시를 쓰겠다 도전하다가도 '나 까짓게 무슨 동시야.' 하면서 좌절하지만 어느 새 또 동시를 쓰고 있는 저. 어쩌면 좋을까요.
"지우려고 하면 더/ 번질 거야// 마음까지/ 물들어 버릴 거야// 파란 파간의 꿈을/ 꾸게 될 거야"가 마치
"너도 계속 시인의 꿈을 꾸게 될거야"라는 주문처럼 들리는데...(저주일지도요) 선생님은 위 시를 읽으며 이루고 싶은 어떤 꿈을 떠올리게 되나요?
고양이 약제사
냐옹!
머리 아픈 두더지에겐 버드나무 껍질
재채기하는 토끼에겐 생각즙
기절한 생쥐에겐 두꺼비독으로 약을 지어 줘
냐옹!
'모든 약은 독이다.'*
이건 약물학 첫 시간에 배우는 가르침
그러니까 약제사냐 독제사냐, 그것이 문제로다
냐옹!
독제사가 되지 않기 위해
약을 꼭 필요한 곳에, 꼭 필요한 만큼 써야 해
난 진정한 고양이 약제사야
냐옹!
무엇보다 기절한 생쥐는 절대 잡아먹지 않아
*오래전 의화학의 시조인 페라셀수스는 "모든 약은 독이다."라며 약의 위해성을 강조했다.
96쪽.
《고양이 약제사》를 쓴 시인은 약사로서의 삶을 오랫동안 살았지만 평생 마음에 품었던 그림을 절대 포기 하지 않았다고 해요. 늦은 나이에 일러스트레이터로 성공한 그녀는 마침내 시인의 꿈도 이루게 되었으니 그녀의 '파란 물감' 이 끝끝내 이 자리까지 데려온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양이 약제사가 마음에 품은 "모든 약은 독이다."라는 말이 마치 우리 삶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련은 성장을, 좌절은 희망을, 위기는 성공을 가져다 주니까요. 마치 동전의 앞뒷면처럼 모든 것이 풀리지 않은 깜깜한 상황에도 그것을 나에게 독으로 사용할 것인지 약으로 사용할 것인지 온전히 나에게 달려 있기에. 그러니 제가 할 수 있는건 "약을 꼭 필요한 곳이, 꼭 필요한 만큼 써야"하는 것처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시련과 아픔만을 주기를 기도할 수밖에요.
힘든 순간에도 "나비처럼 가볍고/ 물방울처럼 빛나는/ 기도처럼 아름다운, 그런// 시"가 저와 선생님에게 선생님에게 닿기를. 그런 시를 쓸 수 있기를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