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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오로라 Sep 04. 2024

선생님, 또 송찬호예요?

《저녁별》 송찬호 시. 소복이 그림. 문학동네. 2011


땅콩


땅속에 크는

콩,

땅콩


땅콩도 이제 다 컸나 보다

땅콩밭에 가 보니

땅속

땅콩집에서

땅콩들이

땅, 콩, 땅, 콩

뛰는 소리 들린다


44쪽




 송찬호 시인의 동시집 《저녁별》에는 아이들과 생각을 나누기 좋은 동시들이 많습니다. 시인은 어린이에게 익숙한 소재들을 동시의 글감으로 많이 사용하였거든요. 동시의 길이도 대부분 3~5연 정도에 쉬운 언어를 사용한 덕에 어린 아이들도 짧은 호흡으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소리 내어 읽어도 막힘이 없는 자연스러운 문장 덕에 아이들과 함께 낭송하기도 좋고요. 

  "땅콩도 이제 다 컸나 보다/...(중략).../ 땅콩들이/ 땅, 콩, 땅, 콩/ 뛰는 소리 들린다"  

 2연을 따라 읽다 보면 "땅, 콩, 땅, 콩"하는 부분에서 진짜 땅콩이 뛰는 것 같기도 하고 덩달이 심장도 콩닥콩닥 뛰는 기분이 드는 동시. 그래서 1학기가 끝날쯤  위 동시를 아이들에게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반응은 "아니, 선생님 또 송찬호예요?!"

 확인해 보니 1학기 동안 매주 나눈 동시 19편 중 3편이나 있더라고요.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말이죠. 그만큼 그의 동시가 어린이 독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있기 때문인가 봅니다.

시를 다 읽고 "시 속의 땅콩도 이제 다 커서 땅콩땅콩 소리를 내는데, 너희는 3학년이 되어서 1학기를 보내고 나니 무엇이 커진 것 같아?"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키가 자랐다는 아이들의 대답이 제일 먼저 나왔습니다. 하지만 다음에 발표한 여학생의 말을 듣고 심쿵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원래 혼자서 멀리 걸어가지 못했는데 처음으로 **까지 친구들이랑 걸어갔어요. 30분이나 걸어서요. 저는 용기가 커진 거 같아요."

 한 아이의 반짝이는 생각이 전염되었는지 나머지 아이들이 쓴 단상도 빛나더군요. 그중 일부만 살짝 보여드릴게요.


 "생각이 늘었다. 내마음은 생각, 생각"

 "처음에는 발표를 시키면 잘 못했는데 지금은 목소리를 더 크게 하고 싶어져요. 그리고 구구단도 거이 다 외어졌어요."

 "동시쓰기가 처음엔 재미었어는데 동시 동아리를 하고 동시가 자주 재미있어졌다."

 "생각. 왜냐하면 2학년 때 수업 생각이 없어는데 3학년 데니까 수업 생각이 더 커저다."

 "나는 3학년에 올라와서 책임감이 올랐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반장이여서 친구들에게 배려하는 책임감이 올랐습니다."

                                                                                           (3학년 아이들이 쓴 글을 그대로 옮김)

 


수박씨를 뱉을 땐


수박을 먹고

수박씨를 뱉을 땐

침처럼 드럽게

퉤, 하고 뱉지 말자


수박을 먹고

수박씨를 뱉을 땐

달고

시원하게

풋, 하고 뱉자


13쪽


 화자가 수박을 먹고 뱉는 단순한 행동을 "퉤"와 "풋"이라는 소리에 맞춰 대조적인 효과를 이뤄낸 동시입니다. 수박을 먹어본 사람이라면 이미 머릿속에 이미지가 그려지는 동시라 특히나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죠.  낭송할 때 "침처럼 드럽게/ 퉤, 하고 뱉지 말자" 부분에선 많은 아이들이 웃음을 터트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쉽게 읽은 만큼 뒤따라오는 생각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수박을 먹는 행위는 시에서 보조 관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죠. (원관념은 시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 보조관념은 원관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대상을 말한답니다.) 보조 관념에 가려져 있는 원관념을 찾는 것이 시 읽기의 재미이...

시인은 수박을 먹는 모습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 것일까요?

 시인이 감춰둔 의미를 찾아보며 해석해 보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하면 더욱 동시를 찾게 된다는 사실! 대신 고차원적인 사고가 필요합니다. 그래서인지 같은 시라도 고학년과 동시 나누기를 할 때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기도 해요.

 작년 5학년 아이들과  이 시를 나눈  수박씨를 먹고 뱉는 행위를 자신의 행동에 연관 지어 풀어쓴 아이들이 꽤 있었거든요.

 

 "상대방을 않 좋게 대하지 말고 착하게 대하자."

 "수박씨도 더럽게 뱉어지면 본인도 기분이 나빠지니까 수박씨도, 먹는 사람도 기분 좋게 달고 시원하게 뱉자는 뜻같다. 수박씨의 기분도 생각해 달라는 시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똑같은 사람이라도 내가 대하는 행동에 따라 그 사람의 모습이나 행동이 달라질 수 있다."

 "수박씨도 우리가 말 처럼 퉤 하고 뱉으면 사방 군데군데 튀고 조심스럽게 풋 하고 뱉으면 목표물에 정확하게 씨가 떨어지니깐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뱉은 말은 사방에 튀고 내가 생각해서 말하면 내가 말할 대상한테 정확하게 전달되는 것 같다"

                                                                                          (5학년 아이들이 쓴 글을 그대로 옮김)

 



포도


포도 한 송이를

다 세어 보니

포도알이 신기하게도

우리 반 인원수와 똑같은 스물 일곱


생긴 것도 다 동글고 똑같은데

선생님은 어떻게 그 하나하나

속속들이 마음을 다 기억하고 계시는 걸까


94쪽



 제가 아이들과 동시를 나누는 건 어쩌면 아이들의 마음을 보고 싶어서일지 모르겠습니다. (동시를 읽으면서 나를 더 깊게 만나고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처럼요.) 한 교실에 스물일곱 명이나 되는 반 아이들의 마음을 모두 들여다보며 헤아려 주기 여간 쉬운 일이 아닙니. 하지만 우린 어린 영혼을 다루는 사람이잖아요. 그렇기에 애쓰지 않고는 보기 힘든 아이의 속마음을 동시를 함께 읽다 보면 살짝은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은 이런 생각도 가끔 합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지켜주고 싶다.'

  우리도 어쩌면 저녁별 같은 존재이지 않을까요. 저녁이 되어야 반짝이는 별. 아이들이 지닌 동심의 빛을 찾아 나서는 저녁별 말이죠.  어쩌면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과 같은 학교 현장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서도 "집집마다 불이/ 어떻게 켜지나 보려"는 저녁별처럼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망울과 목소리를 붙잡으며 그렇게. 반, 짝, 반, 짝. 빛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녁별


서쪽 하늘에

저녁 일찍

별 하나 떴다


깜깜한 저녁이

어떻게 오나 보려고

집집마다 불이

어떻게 켜지나 보려고


자기가 저녁별인지도 모르고

저녁이 어떻게 오려나 보려고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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