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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마스 Dec 30. 2017

응급실 (중)


열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간호사 선생님께서 이따금씩 들어와서 토쥬군의 열을 체크하시며 우리에게 체온을 말씀해 주셨는데, 그래도 아주 천천히라도 열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에 그저 감사했다.


잠이 들고 한 시간 가량이 지났을 무렵, 토쥬군이 잠에서 스르르 깨어났다. 토쥬군은 눈을 뜨자마자 '지금 여기가 어디지?'라는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는데, 낯선 공간에 기저귀만 입고 누워있는 본인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놀랐는지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아내가 안아주자 이내 토쥬군은 울음을 그쳤고, 엄마 품에 안긴 토쥬군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모성애의 힘이었을까? 엄마 품에 안기자 토쥬군의 열은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간호사 선생님이 토쥬군에게 냉장고에서 막 꺼낸 종이 팩에 들어있는 오렌지 주스를 가져와서 줬는데, 빨대로 주스를 맛있게 마시는 모습을 보니 나도 왠지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열을 재본 간호사 선생님도 이제 조금만 더 열이 떨어지면, 집으로 가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진료실 문으로 말끔한 차림의 남성 한분이 들어왔다. 직관적으로 나는 그분이 '진료비 정산' 때문에 온 병원의 재무과 직원임을 깨닫고, 바로 의자에서 일어나 그분에게로 다가갔다. 역시나 나의 예상이 맞았다. 직원분은 진료비와 관련해서 잠시 이야기를 좀 할 수 있느냐고 정중하게 내게 물어봤다. 우리는 진료실 밖의 복도로 이동해서 대화를 시작했다. 직원분은 아주 예의 바르게 우리의 개인 정보를 하나씩 물어봤고, 가져온 서류에다가 그 정보들을 하나씩 기입했다.


역시나 가장 큰 이슈는 '보험'이었다. 직원분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보험이 어떤 것인지, 보장 내역은 어떻게 되는지를 조심스럽게 하지만 꽤 자세하게 물어봤다. 당시, 우리 가족은 한국 보험회사의 1년짜리 유학생 보험에 가입된 상태였다. 주변의 한국 분들에게 미리 물어본 바에 따르면, 이런 응급 상황의 경우 한국 보험으로 커버가 되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다행히 직원 분도 이전에 유학생 보험을 처리해본 경험이 있었는지, 나의 설명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 분은 내게 다음에 한번 더 내원해서 보험 증서를 좀 제출해 달라고 부탁을 했고, 우리는 악수를 하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구체적인 진료비 액수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진료실로 다시 돌아오니, 토쥬군의 상태는 아까보다 더 좋아졌고 간호사 선생님도 우리에게 이제 귀가해도 좋다고 말씀하셨다. 다만 몇 가지 주의사항들을 일러주셨는데,


집에 가서도 몇 시간 간격으로 열을 체크하고 반드시 해열제를 먹일 것

혹시라도 열이 높게 올라가거나, 다시 열성 경련이 발생하면 바로 엠뷸런스를 불러서 응급실로 올 것

내일 아침에 반드시 소아과를 방문해서 후속 진료를 받을 것


그러면서 우리에게 토쥬군의 주치의(primary doctor) 누구냐고 물어봤다. '주치의'... 미국에   이제 겨우 3개월 되었고, 보험이라고는 한국에서 가입해서  유학생 보험이 전부인 우리에게 주치의가 있을 턱이 있나요... 간호사 선생님께 우리의 상황을 설명드리면서, 근처에 우리가 갈만한 소아과를  추천해줄  있냐고 조심스레 여쭤봤다. 간호사 선생님은 어딘가로 가더니 잠시  소아과 연락처가 적혀 있는 종이를 건네며 내일 아침에 이쪽으로 한번 연락을 해보라고 했다. 그리고 응급실 전화번호를 가르쳐주며, 혹시라도 문제가 있거나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을 달라고 했다. 여러모로 경황이 없었던 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친절하게 도와주셨던  간호사 선생님께 지금도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쓸데없는 가정이지만, 만약 그때 응급실에서 불친절한 의료진을 만났더라면 얼마나 서러웠을까...)


응급실을 나오며 시계를 보니 어느덧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 있었다. 응급실에 처음 도착한 시간이 8시 무렵이었으니, 약 네 시간 정도를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중간에 마트에 들러 해열제를 구입한 뒤,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응급실로 향할 때와는 달리, 어느덧 비는 그쳐 있었고 자정 무렵의 젖은 도로 위로는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아이가 있는 집의 상비 해열제인 타이레놀과 모트린 - 모든 부모들의 바람은 유통기한까지 한번도 안뜯고 그냥 버리는 것일 듯


그날 밤은 거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해열제를 먹여도 토쥬군의 열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용법에 적힌 투약 시간 간격에 따라 알람을 맞춘 뒤, 잠든 토쥬군을 깨워서 해열제를 먹일 수밖에 없었다. 한창 잠들어 있는 토쥬군에게 억지로 약을 먹이다 보니, 토쥬군은 중간에 약을 뱉기도 했는데 그럴 때는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아들, 미안해. 그런데 이걸 먹어야 열이 떨어진단다. 제발 뱉지 말고 먹어줘...


그렇게 아내와 나는 쪽잠을 자면서 밤새 토쥬군의 열을 체크하고 해열제를 먹였다.


다음 날 아침.

안타깝게도 토쥬군의 열은 떨어지지 않았다. 밤새 해열제를 먹였음에도 불구하고, 체온계의 숫자는 39도를 가리켰다. 응급실로 전화를 걸어, 아이의 열이 안 떨어지는데 어떡해야 하는지 물어보는 아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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