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이기적인 사람은 나쁜 사람, 이타적인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는 식의, 선과 악이라는 관점에서 그것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로 과거로부터 사람의 본성이 과연 이기적인지 아니면 이타적인지에 대한 많은 설전도 있어왔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성선설과 선악설의 오래된 충돌이다.
법가사상으로 유명한 중국의 철학자 순자는 인간의 본성은 원래 나쁜 존재이니 법으로 강하게 다스려야 한다며 성악설을 주장했고, 공자의 뒤를 이은 맹자는 유가 사상에 따라서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하기 때문에 언제라도 교화시킬 수 있다며 성선설을 주장했다.
서양에서도 영국의 정치 철학자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는,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표현을 통해 인간사회 자체를 이기적 본성의 끝없는 충돌 현장이라고 정의했다. 반면에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라고 주장한 자연주의 철학자 루소(Jean-Jacques Rousseau)도 있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선한데 사회라는 조직에 묶여서 사악하게 변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나름대로 일리기가 있다. 도둑들이 교도소에 가면 교화되어 나오는 경우보다는 오히려 어떻게 하면 빈집을 더 잘 털 수 있는가를 배우고 나오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며 악한 것일까? 아니면 이타적이며 선한 것일까? 과연 어떤 설명이 진실일까?
오래전 과거엔 그런 질문들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겠지만, 지금껏 진행된 사람의 본성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이런 질문은 사실 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성악 성선설이라고 한다.
우리가 그런 존재인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나를 위해서 뭔가를 했지만, 그것이 너에게 이득이 되는 경우가 있으며, 똑같이 나를 위해서 뭔가를 했는데 그것이 너에게 손해를 끼치는 경우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같은 목적으로 같은 행동을 했지만, 그로 인해서 누군가가 이득을 얻는 입장인지 손해를 보는 입장인지에 따라서 선과 악이 결정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내가 아픈 친구를 위해 인맥을 총동원해 유명한 의사의 수술을 빨리 받을 수 있게 해 준 것은 친구 입장에서는 분명히 이타적이고 선한 행동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같은 수술을 받아야 하는 다른 환자들도 거기에 온전히 동의를 할까? 아닐 것이다. 그 의사에게 수술을 받으려고 일 년을 넘게 기다려왔던 환자 한 명은 당신을 '악마'라고 부를 수도 있다.
길거리 거지에게 돈을 주면서 동정을 베푸는 일은 누가 봐도 선한 일이지만, 자꾸 거지들이 모여들어서 더럽고 냄새가 나는 문제로 인해 골치가 아픈 주변 상가 분들에게는 딱히 대놓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속으로는 절로 욕이 나오는 ‘악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상황들은 우리가 속한 사회 속에서 매 순간 수 없이 많이 발생하기 있으며, 거기에 따른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누군가의 행동을 이기적인 나쁜 것인지, 이타적인 좋은 것인지를 판단하려고 드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저 각자 매 순간 자신들을 최대한 행복하게 하려고 노력할 뿐이며, 그로 인해 도움을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행동을 이타적이고 선한 사람이란 평가를 내리고 있고, 손해를 본 사람의 입장에서는 똑같은 행동을 이기적이고 악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릴 뿐이다.
그래서 착한 남자랑 사는 여자가 그리 속이 터지는 것이다. 착한 남자가 받게 되는 끝없는 손해를, 부부라는 이유로 인해 함께 감당해야 하니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의 교육으로 인해 이타적으로 착하게 사는 삶만이 옳고 선한 것이라는 사상을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주입을 받아온 탓에, 그것을 기준으로 상대의 행동을 평가하고 칭찬을 하거나 비난을 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버리고 말았다.
상대방이 어떤 행동을 했든지 간에 상관없이 그저 내가 손해냐 이득이냐에 따라 선과 악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잊은 채 상대방의 행동을 선과 악에는 절대적 기준점이 있다는 식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은 그 어떤 순간에서도 완전히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 타인을 위해서 뭔가를 할 수는 없다는 사실에 오랜 시간을 고민해 왔던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는 결국 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게 된다.
진정한 선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판단력인 순수 이성과 그것을 외부로 실행하는 실천이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여기에서 순수 이성은 인간의 경험과 감정 등을 배재한 선천적 인식능력을 뜻하고, 실천 이성은 오직 도덕을 보편타당하게 해주는 도덕적 이성을 뜻한다. 이 말을 단순히 표현하면, 모든 감정을 배제하고 오직 이성적으로만 판단하여 선을 행할 때만 진정한 선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누군가를 도와야 한다면 그것이 나에게 손해냐 이득이냐를 따지지 말고, 돕고 나서 얻을 수 있는 정신적 만족도 기대하지도 말며, 온전히 논리적으로만 판단해 도울 때만 유일하게 선이란 뜻이다.
처음부터 말이 안 된다. 인간에게서 있어서 감정을 배제하면 그 존재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와 똑같은 지적 능력을 가진 로봇을 보더라도 그 존재가 감정이 없다는 이유로 인해서 철저하게 우리와 구분을 지으려고 한다.
인간은 원래 그 자체가 감정이며, 감정이 유일한 인간의 증거이다. 그러니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할 때 모든 감정을 배제하고 결정하여 행동한다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칸트가 정의한 진정한 선은 결국 이론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선이다.
타인을 위해 숭고한 희생을 했던 콜베 신부나 아이 엄마 그리고 체르노빌의 세 명의 영웅들 역시 그런 행동들을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일어난 수많은 감정들 중에서 자신의 목숨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감정들, 그러니까 누군가에 대한 자비심이나 안타까움 혹은 아이의 죽음이나 인류의 멸망과 같은, 자신의 생명을 잃는 것보다도 더 큰 두려움으로 인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코 그런 행동들이 옳다고 믿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설령 옳다고 믿어서 행동했다고 해도, 자신이 옳은 행동을 했다는 ‘만족감’이 없다면 결코 그런 식으로 행동할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우리 안에 있는 마지막 판단을 내리는 판사는 이성이 아닌 감정이다. 이성은 상황에 따라서 검사의 역할이나 변호사의 역할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재판을 주관하고 있는 판사를 이겨낼 수 없다. 판사의 역할은 오직 감정만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