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너의 '무엇이 이득인가?'에 대한 차이와, 같은 나라고 해도 '지금 당장의 이득과 미래의 이득 중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에 따른 차이가 누군가가 '이타적일 수' 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우리가 각자만의 이득을 추구했는데 옆에 있던 누군가가 우연히 이득을 보게 된 상황에 불과하다. 그로 인해 같은 행동도 우연히 손해가 되면 '이기적인' 것이 되고 만다.
미국의 사회생물학 교수인 로버트 트리버스(Robert Trivers)는 ‘네가 내 등을 긁어주면 다음에 나도 네 등을 긁어주마.’라는 문구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던 이타주의의 개념과는 조금 다른, 상호 이득의 교환을 기반으로 한 『호혜적 이타주의』라는 용어를 새롭게 제시했다.
이것은 한쪽만 일방적으로 손해보고 끝나는, 우리가 알고 있던 의미의 이타주의와 구분하기 위한 용어이다. 하지만 이런 분류는 처음부터 착각이다. 모든 이타주의는 결국엔 이득을 주고받는 상호적 이타주의일 수밖에 없다. 단지 이득에 관한 관점과 이득이 실제로 일어나는 시점의 차이일 뿐이다.
사람들은 그 어떤 경우에도 손해를 거부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손해라는 개념을 단순히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돈을 잃은 것도 손해이지만 진짜 손해는 돈을 잃어서 기분이 나쁜 것이다. 기분이 괜찮으면 돈을 얼마든지 손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이다. 기분만 좋다면 친구들에게 술을 사거나, 지나가던 거지에게 호주머니를 뒤져서 돈을 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인간은 이기적이기도 하지만, 깊은 내면엔 서로를 보살피고 공감해주는 순수한 본성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누군가 길에서 아이를 낳을 것 같은 상황이 되면 다들 나서서 도으며, 그 산모가 아이를 순산하면 마치 자신이 아이를 낳은 것처럼 행복해한다.
하지만 정말로 이런 행동들이 ‘순수한’ 것일까? 아니다. 누가 봐도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조차도 결국엔 나를 위해서 이뤄진다.
그런 일들은 네가 살아야 내가 살 수 있는, ‘동업자’ 정신이 우리의 유전자에 깊게 새겨져 있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것은 수백 만년을 이어 온 공동체 생활을 통해 채득 한 일종의 생존본능이다. 우리는 하나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셋이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안전해진다.
지금은 이 지구 상에 사람이 너무 많고 흔해서 다른 사람들이 오히려 거추장스럽게도 느껴져서 마치 그런 본능이 없는 듯 여겨지지만, 만약 치명적인 전염병과 같은 문제로 인해 이 세상에 혼자 남았다면, 정말로 나와 말이 통하는 단 한 명의 존재에 대한 소중함은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가 아이를 소중하게 지키려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만약 아이가 단 한 명도 없는 사회라면, 도대체 왜 계속 살아가야 할까? 물론 사는 것 자체는 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다 죽고 아무도 남지 않을 세상에서 내가 열심히 사는 이유를 만들기란 쉽지가 않다. 우리가 아이들을 보호해야 하는 진짜 이유이다.
윌 스미스가 주연으로 나왔던 영화 『나는 전설이다』에서 그것에 대해 아주 잘 표현을 했었다. 인류 전체가 다 죽고 유일하게 살아남았다고 믿고 있는 주인공은 감당하기 힘든 외로움과 허무함을 겪게 된다. 그에게 함께 지내던 개마저 없었다며 아마도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
30년을 힘들게 노력해서 인간 세상에 아주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 냈다고 해도, 그 후에 모두 죽는다면 도대체 왜 그런 노력을 하겠는가? 차라리 남들처럼 놀고먹고 살다가 행복하게 삶을 마감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우리는 미래 세대가 있기에 현재를 가치 있게 살 수 있다.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아이를 위해 자신의 삶 대부분을 희생하지만, 사실 그 아이 덕분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론으로 알려진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조차도 아이들이 있었기에 비로소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있다. 그 당시 아이들이 그 이론을 계승해 지금의 세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가능하다면 전혀 모르는 아이들조차도 지키려고 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의 존재는 현재의 내 삶에 도움이 되며, 우리를 미래로 이어 주기 때문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전혀 모르는 타인조차도 가능하면 도우려고 한다. 하지만 그 한계점은 명확하다. 그 본능은 누군가가 내 삶에 도움이 되거나 최소한 방해는 하지 않을 때까지만 유효하다. 반대로 상대로 인해서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놓이면 그 즉시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설령 그 대상이 아이라도 그렇다.
네가 내 삶에 방해가 되면 결국 전쟁이 일어난다. 내 이득을 얻기 위해서나 혹은 나를 위협하는 존재를 죽이는 것, 이것이 바로 전쟁의 본질이다. 물론 전쟁터조차도 가능하다면 아이는 죽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아이가 폭탄을 몸에 두르고 자살 공격을 감행한다면 그 얘기는 달라진다. 슬프지만, 그때는 내가 살기 위해서 아이도 죽여야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가끔 전혀 모르는 거지에게 돈을 적선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거지가 미래의 우리에게 뭔가 이득이 될 가능성은 사실상 전혀 없다. 그러면 혹시 이런 행동은 온전히 이타적이 행동이 되지는 않을까?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상황을 생각해보면 금세 이해가 간다.
며칠은 굶은 듯해 보이고 추운 날씨에 거리의 찬 바닥에 앉아 있으니 불쌍해 보여서 당신은 손에 만 원짜리를 들고 거지에게 그것을 주기 위해서 다가가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그 거지가 일어나더니 당신 손에 든 만 원짜리를 잽싸게 낚아채서 달아나 버렸다.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당신은 어떤 기분이 들까?
결국엔 불쌍한 거지를 도왔으니 여전히 기분이 좋을까? 아니면 도둑놈에게 도둑질을 당한 기분이 들까? 아마 당신이 아주 선한 사람이라면,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불쌍한 거지에게 만원을 건넸으니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거지에게 직접 돈을 주고 그의 고마워하는 눈빛을 보았을 때만큼 기분이 좋을 수는 없다. 더군다나 우리들 대부분은 그렇게까지 착하진 못하다. 그래서 경찰에 거지를 도둑으로 신고할지도 모른다.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장발장이 은식기를 훔쳐 달아난 후 잡혀 왔을 때 신부는 자신이 준 것이라고 하면서 은촛대까지 준다. 이 일을 계기로 장발장은 개과천선을 하게 되지만, 만약 이때 장발장이 ‘이 교회 목사는 정말 호구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교회를 반복적으로 도둑질했다면, 신부는 도대체 언제까지 은촛대를 내어 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