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은 ‘행복’이며,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그 결과를 판단하는 모든 기준점이 된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기존과는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가 있다. 그 순간 나를 둘러싼 세계가 재해석된다. 이때 ‘이타적’인 사람들에 대한 이해도 바뀐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을 했다는 말을 재해석되면, 누군가를 위해 힘듦, 고생, 수고 등의 물질적인 손해를 감수하고도 만족감이라는 정신적인 이득을 얻었다는 뜻으로 바뀐다.
우연히 수용소에서 만난, 사실상 전혀 모르는 사람을 대신해 자신의 소중한 목숨까지 내놓은 신부라고 해도 결국엔 얻은 것이 있다. 바로 정신적 만족이다. 그 만족은 바로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을 수 있는 커다란 사랑과, 설령 그 끝이 죽음이라고 해도 자신이 평소에 믿고 의지했던 신의 뜻에 따를 수 있었다는 평화로움일 것이다. 단지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정신적 만족을 얻기가 힘들다. 우리들 대부분은 아마도 그런 감옥에서라면 감자 한 조각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자신과 아이 중 둘 중 하나만을 살릴 수 있었을 때 아이를 선택하는 산모는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아이를 살릴 수 있을 때가 덜 불행하다. 더 큰 불행과 상대적으로 작은 불행 중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그녀가 목숨을 포기하는 ‘불행을 선택’했다는 사실만 바라보면서 엄마가 자식을 위해 희생했다고만 여긴다. 만약 그녀가 아이 대신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로 결정했다면 살 수는 있었겠지만, 평생 동안 그 아이에 대한 생각을 떨치지 못했을 것이다.
인류를 위해서 위험한 방사능으로 가득 찬 공장 안으로 들어간 세 명의 영웅은 적어도 자신은 비겁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맡은 책임을 다했다는 홀가분함과 대의를 위해 희생을 했다는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혹은 자신의 가족이 있었다면 자신의 가족, 자신의 친구의 삶을 지킬 수 있었다는 다행스러움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타적이란' 착각엔 언제나 물질적 가치에 의한 과도한 평가가 자리 잡고 있다. 그중 가장 흔한 현상 하나가 바로 어떤 제품을 살 때 지불해야 하는 가격을 바라보는 눈이다.
사람들은 많이들 ‘가성비’를 따진다. 가성비는 가격 대비 성능을 뜻하는 줄임말인데, 그러다 보니 가격이 매우 중요한 결정요소로 여겨진다. 하지만 가성비 역시도 '만족감'이 제일 중요하다. 어느 수준의 성능을 지닌 제품을 어떤 가격을 지불했느냐에 따라서 만족도가 달라지며, 그 만족도에 따라 가성비가 좋은지 나쁜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각자의 만족감 정도에 따라서 어떤 제품의 가격이 어느 정도가 합리적 일지 판단하는 지점이 천차만별이게 된다. 이른 봄에 나온 사만 원짜리 하우스 수박을 보고 어떤 사람은 적당하다고 느끼고, 다른 사람은 누가 저 가격에 먹냐며 혀를 찬다. 한 대에 백만 원이 훌쩍 넘는 스마트폰은 누군가에게는 엄청나게 비싼 제품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일 년마다 바꿔줘야 하는 흔한 제품이 된다.
물론 거기엔 가지고 있는 돈이 얼마나 많으냐 여부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그것은 비슷한 수준의 만족감을 느낄 때나 중요하지, 만족도 그 자체가 다르면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어떤 제품을 싸다 비싸다 느끼는 것은 제품의 가격이나 내가 가진 재산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저 내가 얼마만큼 만족할 수 있느냐 여부로 결정이 된다. 가난해도 너무도 갖고 싶은 제품은 비싸지 않다. 또한 부자라도 전혀 필요하지 않은 제품은 싸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쓸 때 참 아까운 것들이 있다. 실수로 내지 못한 세금에 붙은 연체료, 주차비, 우산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집에 우산이 가득한데, 갑자기 비가 와서 우산을 사려면 돈이 그리 아깝다. 안 써도 되는 돈을 써야 하기에 그렇다. 그야말로 쓸데없이 돈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가 돈이 아까운 것은 돈 그 자체가 아니라 ‘쓸데없이’ 돈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얼마나 부자인지 여부는 그리 큰 상관이 없다. 그 누구나 쓸데없는 돈을 써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것이 아까운 것뿐이다. 문제는 그 '쓸데없음'의 기준점이다.
그 기준점이 타인의 소비를 평가할 때 매우 큰 문제를 일으킨다. 착각, 오해, 갈등, 비난 등이 일어난다.
내가 전혀 만족할 수 없는 제품을 아주 비싼 가격으로 사는 사람을 보면 그야말로 “돈지랄하네”, 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된다.
이 세상엔 수천 만원을 하는 오디오 스피커를 샀다는 사람, 하나에 수백 만원을 하는 카메라 렌즈를 여러 개 샀다는 사람, 그저 타고 다닐 뿐인 자전거를 천만 원 주고 샀다는 사람, 가방일 뿐인데 명품이란 이유로 수천 만원 지불한 사람 등등, 자신의 생각엔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 소비를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물론 돈이 많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쓸데없는 돈 낭비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소비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이뤄지는 ‘정신적 만족’에 대해서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을까?
그럼에도 우리는, "그 돈이면 아프리카에 배 곪는 사람들을 수천 명 먹일 수 있겠네"라고 말하고 있다. 비난하고 싶은데 딱히 비난을 할 근거가 없어서 그렇다. 평소에 아프리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으면서 그렇게 말한다. 그렇게 말해야 사람들이 자신의 비난에 동의해준다.
우리는 그들과 달리 아무런 낭비가 없는 소비를 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즐겨 먹는 5천 원짜리 국밥을 보고 그런 음식을 왜 돈 주고 먹냐며, 자신은 돈을 줘도 안 먹겠다고 질겁하는 사람들을 보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나마 한 끼에 5천 원이면 정말로 싼 것 아니냐는 말을 할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또한 얼마나 맛이 있는지 아냐고, 당신도 먹어 보면 알 것이라고 설득하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대가 여전히 역겹다고 하면 그때는 뭐라고 할 것인가? 그것이 수천만 원짜리 스피커에 대한 비난과 뭐가 다를까?
이 세상엔 ‘돈지랄’은 없다. 물론 당사자가 순간적인 충동으로 돈을 잘 못 쓰면 스스로에 대해 그런 후회는 할 수 있다. 하지만 타인이 쓴 돈에 대해서는 -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한 - 돈지랄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은 내가 아니다. 그 사람 역시도 나하고는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끝없이 자신을 기준으로 상대를 본다. 그리고 그 결과를 가지고 이득과 손해를 계산한다. 그것들을 기준으로 이기적이냐 이타적이냐를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