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과 같은 강제수용소에 갇힌 상태에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신부가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악명 높았던 아우슈비츠에 감금되어 있던 막시밀리언 콜베(Sanctus Maximilianus Maria Kolbe) 신부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곳은 언제나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상황이었지만, 평소에도 자신의 먹을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양보하던 콜베 신부는 수용소에서 탈출을 시도한 사람들에 대한 경고로 열 명의 수감자에게 아사형, 그러니까 굶어 죽이는 처벌을 내린 나치를 향해 자신이 그들 중 한 명을 대신해 처벌을 받겠다고 청원했다. 그 청원은 받아들여졌고, 그는 그렇게 누군가를 대신 해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그의 숭고한 희생은 훗날 알려져서 교황청에 의해서 성인으로 추대가 된다.
어떤 여자가 오랜 노력 끝에 아이를 가진다. 그런데 그 아이를 가지게 됨으로써 산모는 몹쓸 병에 걸린다. 더군다나 그녀를 진료한 의사들은 치료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포기해야만 한다고 한다. 하지만 산모는 단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그 제안을 거부한다. 내가 살기 위해서 아이를 포기할 수는 없다고 한다. 열 달 동안, 산모는 천천히 죽어가고 엄마의 생명의 힘을 빨아들인 아이는 결국 건강하게 태어난다.
그녀의 선택을 충분히 존중하지만, 인간적인 안타까움 마음으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봤던 의사들은 아이가 온전히 태어나서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에 모든 생명활동을 멈춘 엄마에게서 천천히 호흡기를 뗀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들이 평소 어떤 존재였는지에 상관없이 모두 ‘모성애’라는 지고지순한 사랑의 힘이 가진 깊은 울림을 느끼게 된다.
구소련의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붕괴된 노심으로 인해 발생된 고온의 용암과 그 밑에 있는 대규모 물이 만날 경우 엄청난 규모로 폭발할 위험이 있었다. 당시에 사고를 담당했던 전문가들은 그런 일이 일어나면 인류 종말에 가까운 재앙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누군가 들어가 수작업으로 물을 빼야 했다. 하지만 강한 방사능이 가득한 그곳에 가는 것 자체가 자살 행위였다. 그런데 그런 위험을 알고도 세 명이 자원을 한다. 그들은 각각 알렉세이 아나넨코, 발레리 베스파로프, 보리스 바라노프이란 이름을 가졌으며,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그 일을 해 냈다.
만약 그들의 그런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 현대의 문명은 엄청난 위기를 맞이했을 것이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그만큼이나 전 지구적인 최악의 사건이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우리 인간에게는 분명히 이타적인 면이 있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런 사례를 보고도 여전히 처음 던진 질문은 유효하다. 우리 인간은 정말로 이타적일 수 있을까? 콜베 신부, 아이의 엄마, 세 명의 지원자들과 같은 사람들은 정말로 ‘이타적’으로 행동한 것일까?
아니,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자. 이들은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해서 우리 인간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자신의 목숨을 포기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과연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자신의 목숨이 가장 소중한 것일까? 목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일까?
언뜻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좀 더 깊게 생각해보면 매우 혼란스럽다. 그렇지 않다는 실제 예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멀리 있지도 않다. 신문에 매일 나오고 있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 그러니까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 증거가 된다.
만약 인간에게 있어서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면 자살하는 사람이 결코 나와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자살을 한 것이다. 그것을 얻지 못하니 절망에 빠져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자신의 목숨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눈앞에 닥친 시련은 우리를 포기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극복에 대한 강한 의지를 불러일으켜 단련시킨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끝없는 절망은 우리를 지치게 만들고 결국엔 삶을 포기하게 만들고 만다.
이타적이란 말의 의미는, 손해를 보면서도 자신이 아닌 타인의 이득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이기적이냐, 이타적이냐를 구분하는 기준점이 바로 이득과 손해에 관한 경계 지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무엇이 이득이고 무엇이 손해일까? 이 시점에서 아주 커다란 착각 하나가 생겨나게 된다. 우리는 보통 이득과 손해를 오직 물질적인 것으로만 판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물질적 이득을 노리고 하면 이기적이고, 물질적 손해를 보면서도 무엇인가를 하면 이타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물질적인 것들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다. 결국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은 가장 최악의 물질적 손해가 된다. 그러니 당연히 최고의 이타적 행위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가장 소중한 물질을 스스로 포기하기도 한다. 도대체 왜 자신의 목숨을 포기할까?
분명히 무엇인가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는 증거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을 포기할 만큼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는 매일 '목숨보다 소중한' 그것을 기준점으로 이득과 손해를 판단하고 있다.
바로 ‘행복’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목숨이 아니다. 행복이다. 그래서 힘들면 죽고 싶은 것이다. 너무 불행한 삶은 오히려 사는 것보다도 못하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이유이며, 말기 암에 걸려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안락사나 존엄사를 바라는 이유이다.
비록 인간에 한해서 통용되는 표현이지만, 행복은 목숨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이타적일 수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기준은 목숨이 아닌 행복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이길래 목숨보다도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을 찾을 수 있을 때 우리가 이타적일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